당신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눈을 감고 엄마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세요.
당신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저는 따스한 이미지보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쥐어짜도 물기하나 없이, 앙상한 나뭇가지는 부러트리면 지금이라도 툭 부러질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살아야 하니까 사는 그저 그런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이 생각났어요.
엄마의 표정은 늘 힘들어보였고, 지쳐보였고, 짜증이 가득차 있었어요. 매일은 아니지만 웃는 표정을 그리 많이 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웃음보다 인상을 더 많이 써서 가만히 있을 때조차 인상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사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 사람. 웃는 것이 어색한 사람이였죠.
물론, 엄마의 삶을 보면, 엄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어머니 아래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났고 6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무서웠던 큰 오빠, 말수가 적은 작은 오빠 사이에서 막내로서의 귀여움보다는 집안에 있는 여자로서 집안일을 떠맡고, 공부도 초등학교까지만 다닐 수밖에 없었던, 삶 자체가 존재에 대한 인정보다 그저 숨죽이며 많이 억눌려 살아왔지요.
23살에 중매결혼으로 경상북도 봉화의 시골 한 가난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자식 넷을 낳아 키우며, 어렵게 집도 사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가 싶었는데, 43살에 남편을 한순간에 사별하게 되죠. 남편이 남겨둔 과일 과게를 억척스럽게 이어가다, 딸들도 커서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도 보고, 마지막 아들의 결혼만을 남겨두었던 그때 자신보다 소중했던 아들을 먼저 보내게 된 기구한 삶. 그 삶이 제 어머니가 아니길 바랄만큼 얼마나 힘든 인생인지 잘 알 것 같아요.
엄마는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선택하면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 되기에, 자신이 선택하는 것을 포기하고, 남들이 선택한 결과에 핑계 대기를 선택하셨던 것 같아요. 자신이 사고 싶은 신발하나도, 어떤 것이 마음이 드는지 몰라, 딸들에게 몇 십번을 묻고, 그렇게 어렵게 산 신발은 조금 신다보면, “이건 신어보니 불편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후회된다”며, “네가 사라고 했는데 이상하다”라며 자식들에게 푸념하는 날이 많았지요. 지금까지 마음에 딱 드는 신발을 산 적이 제 기억엔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엄마는 공부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자식 중에서도 큰딸인 저와 막내 아들의 교육에 많은 돈을 쓰셨지요, 당시에 과외도 받고, 윤선생 같은 전화 영어도 했었지요, 아마도 자신의 배움에 대한 결핍을 자식들이 채워주길 바랬던 것 같아요. 다행히 아들은 무척 공부를 잘했지요, 전교 1등도하고, 국내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도 가게 되었지요, 동생의 대학 입학 소식을 처음 들으셨을 때, 저는 그 옆에 있진 못했지만, 아마도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 아니였을까요?
‘내 자식이 이번에 전교 1등을 했다, 반장을 했다’는 것은 자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돈에 대한 집착도 상당했지요. 어떤 걸 살 때마다 “그게 얼마냐? 아이고 그렇게 비싼걸 샀냐?” 돈돈돈하며 살았던 모습, 본인이 살아왔던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그 모습이 너무 싫었고, 저도 모르게 닮아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제가 엄마를 저렇게 만든 건가 하는 죄책감도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엄마를 보고 있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짠한 마음, 저 사람을 보면 짠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내가 태어나 그 삶을 살게 한 것 같아서, 어릴 때부터 일기장을 보면 엄마를 항상 보호해야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엄마는 약한 존재이니 내가 나서서 보호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저는 더 강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 같아요. 커서 알았지만 너무 일찍 어른아이가 된 것이죠. 아이와 부모가 뒤바뀐 상태. 아이였던 시절을 아이답지 못하게 보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아쉬움과 억울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런 엄마를 두고 집을 떠나고 싶기도 했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학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그냥 가방 하나만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서울 생활이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지금의 나이가 되니 끊임없이 나를 봐달라는 엄마의 반복되는 신호가 너무 싫었습니다.
‘나 좀 봐죠, 나 약하니까, 불쌍하잖아, 내 이야기 함부로 들으면 안돼’
‘나는 약자야. 그러니까 너희가 잘 알아서 나를 돌봐야해‘
부모로서의 권위는 없었고, 그래서 자식들은 불안했고, 받쳐주는 기둥없이 흔들리며 살았던 것 같아요. 엄마의 삶을 걱정하는 딸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엄마는 딸들에게 늘 서운함을 이야기 합니다.
“왜 다른 집 딸들은 엄마를 끔찍이 생각하고, 친구같이 잘 지내는데 너희들은 하나같이 왜 그러냐”
‘안보여주셨잖아요, 엄마가 행복한 모습을, 삶은 꽤 괜찮다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도 그럴 수 없는 거예요. 왜 자식이 부모를 걱정하게 만드셨나요?, 왜 자식이 해결해줘야 하나요? 왜 그런 무거운 짐을 지게 했나요?’라고 속으로 원망도 해봅니다.
엄마가 먼저 행복해야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아이들은 그걸 공기처럼 받아들이며 살고 있고, 그 긴 시간동안 몸에 베인 것을 한 순간에 바꿀 수 없는 것 같아요. 이제라도, 제 아이들을 위해 저의 행복을 선택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