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장면은 결국 나를 담는다. 그러니, 좋아한다고 더 크게 외치자.
어떤 작품을 딱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실은 내 얘기를 조금 하게 된다. 취향은 설명 같지만, 결국 자서전의 한 문단이다. 우리는 전체 메시지를 해석하기도 하고, 그냥 한 장면을 오래 곱씹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끝내 남는 건 단 하나다. 지금의 나에게 설득되고 공감된 무언가. 그래서 취향은 그 사람을 담는다.
최근에 〈킹키부츠〉를 다시 보면서 그걸 더 선명하게 느꼈다. 작품은 화려하고, 신나고, 가벼운 농담도 많다. 근데 이상하게 내 안에 남는 건 반짝이는 하이힐이 아니라,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작품은 계속 그쪽으로 사람을 데려간다. 돌아올 줄 아는 용기, 남들이 옳다고 하는 길을 의심하는 용기, 그리고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을 끝까지 감당하는 태도 같은 것들.
그 질문이 더 크게 들린 건, 내 지난 몇 년이 거기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공학에서 경영으로 방향을 틀 때, 모두가 괜찮다던 대기업 대신 스타트업으로 들어설 때, 그리고 요즘처럼 글을 쓰기 시작할 때—나는 늘 매몰비용과 남의 시선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그럴 때마다 나를 앞으로 밀어준 문장이 있었다. “1%라도 덜 후회하도록.” 돌이켜보면 그 말도 내가 좋아하던 어떤 드라마에서 받아 적은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내 취향의 뿌리는, 결국 내가 어떤 삶을 원했는지에 대한 힌트다.
취향은 거울이면서 창문이다. 거울일 때, 우리는 작품 속 문장에서 내 표정을 본다. “맞아, 나 지금 이 마음이야.” 창문일 때, 다른 사람의 세계관과 리듬을 빌려 잠깐 외출한다. 같은 작품을 보고도 누군가는 화려한 쇼를 기억하고,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를 가져간다. 나는 요즘, 그 말이 ‘포용’보다 ‘결심’ 쪽으로 들린다. 내가 가는 길을 내가 인정하는 일, 그리고 그 인정이 결국 내 선택을 덜 흔들리게 만든다는 뜻으로.
그렇기에 더 확신한다. 콘텐츠와 사람의 핏은, 지금 내 삶이 어디에 와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갈림길 앞에 선 사람은 “돌아갈 용기”를 더 선명하게 듣고, 이미 선택을 마친 사람은 “대가를 감당하는 태도”를 더 또렷하게 가져간다. 같은 장면인데, 각자가 서 있는 좌표가 달라서 다른 문장이 남는다. 취향이 자서전이 되는 이유는 여기 있다. 좋아하는 장면은 늘 현재의 나를 지나간다.
그래서 나는 내 취향을 기록하기로 했다. 거창하게 평론가처럼이 아니라, 내 삶의 좌표처럼. 왜 이 장면이 좋았는지, 어떤 문장이 박혔는지, 그날의 나에게 어떤 변명이 필요했는지를 써 둔다. 그러면 시간이 지난 뒤에도 알 수 있다. “아, 내가 그때는 이런 이유로 이 말을 사랑했구나.” 취향의 변천사는 곧 내가 걸어온 방향의 기록이라서, 부끄럽지 않게 잘 모아두고 싶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창’을 조금 더 많이 열어두려 한다. 누군가의 세계를 보려고. 이건 포용의 얘기라기보다, 길을 고르는 방식의 얘기다. 누구는 돌파를 선택하고, 누구는 유턴을 선택하고, 누구는 천천히 우회로를 만들면서 간다. 좋아하는 장면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장면을 좋아한 이유”까지 말하게 되고, 그 이유가 곧 그 사람의 선택 기준을 보여준다. 취향을 묻는 일은, 상대의 지도를 빌리는 일과 비슷하다. 저 사람은 어떤 길에서 덜 무너지는지, 어떤 갈림길에서 끝내 자기 쪽으로 돌아오는지.
취향은 결국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한 문장에 설득되었다면, 내 하루의 어디쯤에 그 문장을 내려놓아야 한다. 약속을 지키는 방식, 말의 무게를 버티는 태도, 작은 결정을 내리는 속도 같은 것들. 나는 오늘도 “1%라도 덜 후회하도록”을 체크리스트 맨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좋아한 그 메시지를, 오늘의 나로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콘텐츠에 대한 취향은 그 사람을 담는다. 그래서 더 많이 읽고, 보고, 듣고, 적으려 한다. 차곡차곡 내 세상을 보여주는 기록을 쌓고, 동시에 다른 이의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넓히기 위해.
나도 그런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도 괜찮다고, 가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그렇게 걸어가는 2026년을, 천천히—하지만 분명하게—만들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