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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묵 May 06. 2024

쟁여놓기 본능

2024년 5월 5일

산중에 철쭉이 피면 송화가루가 날리기 시작한다.  밖에 내놓은 물건은 어김없이 노란 꽃가루를 뒤집어쓴다.  봄에는 송화가루, 여름에는 벌레, 가을에는 낙엽, 겨울에는 추위를 견뎌야 하는 산중의 삶은 걱정이 많다.  봄에는 나물, 여름에는 채소와 열매, 가을에는 곡식이 한 철만 나니 쟁여 놓아야 한다.  그래야 해를 넘겨 다시 나물이 나고, 채소와 열매를 따고, 햇곡식을 추수할 때까지 먹을 수 있다.  봄에는 명이나물 장아찌를 담그고 지천에 널린 쑥이며 두릅을 따고 데쳐서 냉동고에 넣는다.  여름에는 오이로 피클을 만들고 옥수수를 쪄서 또 냉동고에 쟁인다.  가을에는 고구마를 저장고에 보관하고 말려 놓은 옥수수를 볶는다.  겨울이면 뒤뜰에 김장독을 묻고 김치를 쟁인다.  먹고사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삶이 더없이 단순하다.  


살면서 큰 것을 이루어 보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그래도 인생은 복잡했고 파란만장했다.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 스트레스라고 하는 긴장과 하찮은 걱정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쟁여놓기만 하고 여유 있게 쓸 줄 몰랐다.  모두들 쟁여놓는 행위 자체에만 집착하다 보니 돈을 벌어도 마음은 인색하다.  냉동고에 들어찬 음식은 유효기간을 넘기기 일쑤고 옷 장의 옷은 짐이 된다.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쟁인다.  집을 사고 승진을 해도 더 큰 집을 바라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은 오히려 커진다.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옆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기만 한다.  그래서 오늘의 행복을 또 내일로 미루면서 '미래'라는 허구에 사로 잡혀 마음은 현재에 머무르지 못한다.  내 영혼을 과거에 두고 내 이성만 앞으로 앞으로 달려간다.    



종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아침 일찍 서둘러 옥수수 모종을 심었다.  '10시부터 비가 온다고 했으니 8시부터는 모종을 심어야겠구나'하고 어젯밤부터 머릿속은 오늘을 준비했다.  비 옷을 입고 모종을 심는다.  올해는 제법 요령이 생겨 속도가 빠르다.  30평 남짓한 텃밭이 오늘만큼은 그리 넓어 보일 수 없다.  봄 비 속에서 연신 허리를 굽혔다 펴며 나도 모르게 '어~ 휴~'하고 외마디 탄식을 한다.  그래도 오늘은 비가 내리니 모종을 심고 물을 줄 필요는 없다.  미리 심어 놓았던 고구마, 대파, 참외, 토마토 모종도 일주일 만에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이 비에 힘겨웠던 일주일의 땀을 씻어 낸다.  봄 꽃은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대상이었지만 이 농작물은 내가 책임지고 키워야 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독락당에 내려올 때면 먼저 밭을 한 바퀴 돈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파생된 감정을 마음에 차곡차곡 쟁여놓는다.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정말 어렵다.  기억, 추억,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희로애락의 감정과 대상을 되뇐다.  반면 우리 자신과 대면하게 하는 영혼은 저 구석 어딘가에 방치해 둔다.  흘려보내야 할 감정은 쟁여놓고, 쟁여놓아 할 영혼은 어딘가에 두고 다닌다.  영혼과 대면하는 순간을 쟁이면 소모적인 감정은 점점 사라진다.  종일 봄 비가 부슬거린다.  송화가루도 깨끗이 씻겨 나간다.  옥수수며, 호박이며 이 비와 함께 심어 놓은 모종의 키가 자라고 초록색이 짙어간다.  밭을 갈고 퇴비를 뿌리고 모종도 쟁여 놓았으니 이제 해와 비를 기다리면 될 일이다.  자급자족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삶이 신기하다.  이 계절에 쟁여놓아야 할 것을 끝내고 나니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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