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관리의 죽음’과 ‘드라마’
단편 문학의 천재 안톤 체호프는 1860년 러시아의 항구도시에서 태어나 1904년 ‘나는 죽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모순과 부조리로 얼룩진 경직된 사회에서 가난과 폐결핵에 시달리며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썼다. 서민과 귀족으로 구별되는 당시의 사회적 불평등은 계층 간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윗사람은 지시에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자기 중심성에 빠지고, 아랫사람은 복종하는 미덕에 취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다. ‘관리의 죽음’이나 ‘드라마’와 같은 작품들은 사소한 일상을 소재로 이러한 비극적 사회상을 희극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상하위계가 구분된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대화를 이어갈수록 이성적 오해는 커지고 부정적 감정은 발전한다. 결국 두 명의 아랫사람은 죽음을 맞이한다.
‘관리의 죽음’에서는 오페라 공연장에서 상관인 앞사람에게 재채기를 한 관리가 사과를 한다. 상관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관리가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공연장과 사무실에서 거듭 사과를 하자 ‘화(Anger)’를 낸다. 관리는 ‘꺼져!!’라는 상관의 말 한마디에 ‘멘붕’ 상태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드라마’에서는 한 숙녀 작가 지망생의 희곡을 마지못해 들어주는 작가의 내면적 독백이 지루함에서 분노와 경멸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마침내 문진을 들어 작가 지망생의 머리를 내려쳐 죽인다. 두 죽음을 맞이한 독자는 웃으면서도 슬픈 양가감정이 교차한다. 대화를 이어가지만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성찰하지 못하고, 말로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해 극단의 불통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왜 마주 앉아 대화하는가?
<화가 났다는 얘기야...... 아니, 이대로 내버려 둬선 안 되겠어...... 해명을 해야지> 관리는 해명을 하기 위해 상관과 대화하길 원했다. 무례함에 대한 경위를 설명하고 사과의 감정을 전달하여 문제 상황을 종결하고 싶었다. 말이 대화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화 당사자들이 ‘관계’로 서로를 연결해야 한다. 우리가 출신, 취미 등 대화 상대방의 배경정보를 사전에 구하고, 보편적이고 사소한 날씨나 뉴스 등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이유는 공통점을 찾아 서로를 연결하기 위한 노력이다. 눈을 마주 보고 대화하고 끄덕임의 리액션을 보이는 것도 연결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본능이다. 관리와 상관은 상하관계와 제한된 시간으로 인해 연결의 과정을 생략했다.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약한 신뢰가 형성된 것이다. 신뢰가 강할수록 개인은 생각의 프라이버시를 더욱더 넓은 범위로 공개한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감정과 입장을 순화해서 표현한다.
대화는 각자의 생각을 솔직하고 충분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공동의 생각을 만들어 공유하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 감정을 표현하여 순화하고 말로 표현된 입장을 교류하고 절충하면서 서로가 동의하는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내야 한다. 생산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의 대립과 교류 과정을 거치면서 절충과 타협뿐만 아니라 모두가 만족하는 새로운 생각을 창조할 수 있다. 대화의 주제가 공동체의 가치나 비전 또는 문제해결이었다면 우리는 가치나 비전, 그리고 문제와 해법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가지게 되고 연대의식을 느끼게 된다. 의도적인 약한 연결로 시작된 대화가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고 공동체의 연대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고 공유하면서 연대하고, 관계를 지속하여 공동체 정신을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는 마주 앉아 대화한다.
대화가 소통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더듬더듬 말했다.> <각하! 제가 감히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된 이유는 외람된 말씀이지만 참회의 감정 때문입니다.> 관리는 자신의 재채기로 인해 침이 튄 사람이 ‘윗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사과의 말에서도 지나친 공손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공손하게 전달한다. 직책이나 직급, 나이 등 사회적 통념에 의해서 주어지는 위계는 소통의 가장 큰 방해요소가 된다. 대화에 임할 때는 누구나 동등해야 한다. 특히 ‘윗사람’의 태도가 중요하다. 존칭을 사용하고, 경어를 쓰고, 귀 기울여 듣는 자세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표시한다. 많은 조직에서 직급체계를 없애고 닉네임을 쓰거나, 회의에 그라운드 룰이 존재하는 이유도 결국은 동등함을 기초로 대화의 꽃을 피우기 위한 것이다.
동등한 관계로 서로를 인식하며 편안한 대화 분위기가 형성됐다면 이제는 예의 바른 경청이 중요하다. 경청은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는 신호, 리액션을 보내는 것이다. 또한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경청은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을 더 많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 적정한 질문을 이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화 참가자에게는 솔직하게 자신을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생각의 차이에 대해 솔직하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용기, 상대방의 좋은 생각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 동등함에 대한 인식, 예의 바른 경청, 솔직함의 용기는 대화가 소통에 이르기 위한 밑거름이 된다. 이 세 가지 인식은 다양한 사람들과 상황(TPO, Time, Place, Occasion)에서 우리의 대화 능력을 끌어올린다.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 어떤 역량이 필요한가?
<파벨 바실리치는 오로지 자신의 글만을 사랑했다. 남의 글을 읽거나 듣게 될 때는 항상 대포 구멍이 자신의 면상을 직통으로 겨누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파벨 바실리치) 가슴속으로부터 치솟아나오는 듯한 괴기스런 비명을 지르더니 묵직한 문진을 집어 들고 그것으로 무랴슈키나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날 잡아가라. 내가 그녀를 죽였다!”> 바실리치는 타인과의 대화보다는 자신과의 독백에 능하다. 작가 지망생과의 대화는 건성건성했고, 대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과의 내면적 대화에 더욱 집중했다. 예의 바른 경청보다는 자신과 대화를 이어가면서 지루함을 분노로 키우고 결국은 작가 지망생을 죽이게 된다. 그는 왜 똑똑한 대화 바보가 되었을까?
초기 산업사회에서는 IQ와 생산성이 중요했고,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EQ와 창조성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 인공지능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기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라도 대화 지능 DQ(Dialogue Quotient)가 높아야 한다. 대화 지능은 언어지능, 관계지능, 성찰지능으로 구성된다. 언어지능은 자신의 생각을 말의 뉘앙스나 순서, 리듬 등 언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대화를 잘할 가능성도 높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듣는 사람의 이해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는 현상을 흔히 경험한다. 나의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관계지능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대화를 지속하면서 자신의 감정 변화나 생각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는 성찰지능이 발달해야 바실리치가 범한 우를 피할 수 있다. 효과적으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지능,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관계지능,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 할 수 있는 성찰지능이 높아야 대화를 잘할 수 있다. 똑똑한 대화 바보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자!
참고도서: 세계문학전집 70 체호프 단편선(민음사,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박현섭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