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덕질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내게도 나만 혼자 가지고 있는 비밀 하나가 있다.
남편도, 가족도, 아이에게도 공개하지 못할
아니, 하고 싶지 않은…
그건 바로 나의 덕질이다.
에이 뭐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나처럼 중구난방 관심사가 adhd 만큼 들쑥날쑥한 사람에게 덕질은 그야말로 공개하기 조금 부끄러운 것이다.
왜냐면 관심사가 너무 들쑥날쑥 바뀌기 때문에 왠지 충성심이 있어야 할 거 같은 팬덤에는 낄 수가 없고, 또 나의 덕질은 특정 사람뿐만 아니라 문화, 만화, 기호식품 이런 걸로도 확장되는데 소위 애호가라 부를 만큼 깊은 지식을 쌓기 전에 바뀌기 때문에 딱히 이걸 좋아한다 자신 있게 말할 정도도 못 된다. 뭐든 끈기 있게 잘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투영되어 보인달까. 그래서 그냥 혼자 조용하고 은밀하게 좋아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 나도 20대나 30 초반까지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고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덕질을 공유한다는 게 남사스럽기도 하고 아이 낳고는… 사실 누구에게 설명하는 거 자체가 귀찮다.
이건 남편한테도 동일하다. 부부가 모든 활동을 같이 할 필요도 없다 생각하는 주의 기도 하고. 또 워낙 덕질과 거리가 머어언 남편인지라 내가 뭐 좋아한다 하면 현생을 살아라 귀찮은 일 하지 말고 하면서 툭툭거리고, 또 내가 좋아하는 걸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 듣기도 싫기 때문에ㅋㅋㅋㅋ말 안 함ㅋㅋㅋㅋ
(결혼 10년 차면 이렇게 됨ㅋㅋㅋ)
암튼간 요즘 내가 빠진 것은 제이팝이다.
예전엔 몰랐는데 가사가 너무 좋고 멜로디도 좋고
가창력이 다들 미쳤….
그중에서도 유우리(Yuuri)란 가수를 좋아한다.
베텔기우스라고 유명한 노래가 유튜브에 떠다니길래 듣게 됐는데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사도 모르면서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차오르는 벅찬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알고 나선 매일 잠자기 전 들었던 거 같다.
진짜 너무 힘들었던 시간들을 이 노래를 들으면서 버텼다. 그 이후부터 다른 제이팝 가수들의 노래도 듣게 되었다.
한 번만이라도 이 사람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내한하는지 엄청 찾아봤는데
작년엔 일이 있어 도저히 갈 수가 없었고
다행히도! 올해도 내한을 한다는 소식에 꼭 가야겠다 마음을 먹고 예매를 했다.
어릴 적엔 가수든 누구든 좋아하면 노래보단 이 사람의 외모, 능력 등에 더 집중했었다. 나이가 들고 결혼도 하고 나니 사실 가수의 개인사(열애설 포함) 이런 거보다는 그 사람의 노래에 더 집중하게 되는 거 같고, 그 사람의 신변잡기보다는 그 사람이 가진 인생의 스토리를 더 보게 되는 거 같다. 정말 진정한 팬이 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어릴 때 같았다면 콘서트는 무조건 앞자리서 얼굴을 보고 말겠다!! 는 열망으로 티켓 오픈일에 막 클릭질을 하려고 했을 텐데 이번엔 정말 그냥 라이브로 목소리 한 번만 듣고 싶다는 열망으로 예매를 했다.
스탠딩 할 체력과 열정도 없고. 혼자서 그냥 조용히 앉아서 음악감상만 하고 가자 하며 2층의 자리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콘서트를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1-4월까지의 모든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었다. 어떤 노래가 나올까, 가사를 외울까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노래를 들었다. 콘서트를 간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 안 했기에. 누구도 모르고 나만 아는 나의 콘서트 같은 느낌이라 생각할수록 설레었다.
콘서트 당일.
남편에게는 친구를 만난다 둘러대고는 길을 나섰다.
몇 시간 동안 아이를 맡은 남편에겐 미안하지만(그동안 나도 혼자 많이 봤잖아) 뭔가 신이 났다.
오랜만의 콘서트라 사람도 많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버버 하다가 겨우 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콘서트 입장 전에 소심하게 대에충 사진을 찍었다. 티켓 들고 찍는 건 좀 쑥스러워서 생략…. 굿즈도 부스를 발견 못해서 생략(너무 시간 맞춰서 들어가서ㅠㅠ)
다시 생각해 보니 좀 더 열심히 찍을걸 후회가 된다.
콘서트 후기.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고 들어갔는데 사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보여 좀 위축됐다.
하지만 콘서트가 시작되자마자 너무너무 신이 났다.
누가 보든 말든 돌고래 소리 내고 리듬을 타면서 박수를 쳤다. 조명도 어두워서 아무도 신경 안 써서 자유로는 느낌이 들었다. 아드레날린이 대폭발 하며 이걸 예매한 나 자신을 너무 칭찬하고 싶었다!
이어지는 강렬한 라이브!
음향을 뚫고 나오는 가창력이 정말 대단했고, 뭘 먹고 자랐는지 목소리 왜 이렇게 짱짱한거여…
기타 2 드럼 키보드 그리고 보컬 하나만 있어 구성이 단출해 보였는데 무대에서 나오는 소리는 꽉 찬 느낌.
정신없이 이어지는 곡들에 물 한번 안 먹고 노래를 부르는데… 원래 이런 건가 이 사람이 대단한 건가… 왕년에 내가 토이 신승훈 성시경 콘서트도 가 본 사람인데 이 정도의 느낌이 아니었는데… 혼자 유우리가 젊은가?
20대였던가? 생각했던 늙은이
마지막 곡은 플러스원이란 노래였는데
많이 들어본 곡은 아니었는데 요즘 내 상황이랑 겹치면서 눈물이 살짝 날 뻔했다.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듯한 가사. 그리고 그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당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나. 이 셋이 합쳐지면서 이 장면이 그에게 참 감동적인 순간일 거란 생각을 했다.(물론 관객인 나에게도)
노래를 잘하면 잘 생겨보인댔나. 솔직히 선이 굵다.. 이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중간중간 스크린에서 머리를 흩날리는 유우리를 볼 때마다 심쿵… 잘생겼었구나 몰랐네…이런 느낌. 노래를 부를 때 표정이 살아있어서 표현력이 참 좋은 가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앵콜곡은 대망의 베텔기우스였고 모두 다 떼창으로 불렀는데 너무나 신나 하고 좋아하는 가수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싶었다. 엄마의 마음으로 한국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이런 생각도 살짝ㅋㅋㅋㅋㅋㅋ
10년 만에 혼자,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참석한 콘서트를 다녀와서 느낀 점은.
역시 그동안 열심히 공부만 하지 않고 이런저런 덕질을 해온 나 자신 너무 잘했구나,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ㅋㅋㅋ나의 다양한 관심이 아니었다면 이런 곳에 혼자 올 생각도 못했겠지.
예전엔 만화보고, 음악이나 듣고 하는 게 다 쓸모없는 행동이라 생각했는데 나이가 드니 사람은 다 자기가 쌓아오고 해온 것에서 스스로를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청소년 때 본조비부터 린킨파크까지 여러 노래들을 안 들었다면, 고등학생 때 일본어 공부하는 친구 때문에 엑스재팬 노래를 건너건너 듣지 않았다면. 락 사운드에 익숙하지도, 제이팝이고 뭐고 알지도 못했겠지. 콘서트에서 혼자 즐기지도 못했겠지. 나는 그런 것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언젠가 견딜 수없이 외롭거나 힘든 시간이 와도 이렇게 즐겁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록페스티벌 가보고 싶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에너지, 아드레날린. 와 진짜 재밌구나 콘서트! 다만 그건 혼자 참석이 힘들 텐데 어쩌지…
마지막으로. 유우리 정말 팬입니다 사랑합니다.
열심히 살다가 다음에 오면 또 콘서트 보러 갈 거야! 또 만나자 유우리!
즐거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