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도 Oct 13. 2024

파리에서 2 -문득 불안해도 그래도 퇴사하길 잘했다.


이탈리아 말펜사 공항에서 파리 오를리공항으로의 이륙을 기다리며 했던 메모가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파리여행 2주 차, 여행의 피곤함으로 현실을 잊어갈 때쯤 공항의 기다림은 나를 생각의 길로 안내한다. 쉽게 동양인을 찾아볼 수 없는 생경한 풍경이 낯설었고 그러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소름이 돋았다.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먹여 살릴 월급이 나오지 않는데?!’ 그런 현실에 닭살이 오도독 돋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파리의 작은 공항에 앉아있는 나, 파리에서 이탈리아 밀라노와 루가노 호수를 1박 2일로 둘러보고 떠나는 나, 이런 내 모습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만약 도망치지 않고 계속 그곳에 있었더라면, 나는 똑같이 괴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겠지. 이런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미룰 수밖에 없었겠지. 잘했다. 아주 잘했다. 스스로를 그렇게 칭찬하니 머릿속에 한 줄이 남았다. 그 기분과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 급하게 휴대폰 메모장에 한 줄을 갈겨썼다. “그래도 퇴사하길 잘했다”


하지만 공항에서도 노트북을 켜고 내내 일처리를 하고 있는 듯한 옆에 앉은 이탈리아 아저씨의 타자 소리가 영 거슬렸다. 저렇게 자기 일에 매진하고 있는 사람이라니. 차림새로 보아 출장길이겠지?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고,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십여 년간 해 온 일은 회사를 나온 순간 이렇게 쉽게 툭 끊어지다니 야속했다, 그 시간들은 어디로 흩어졌는가.


공항에 앉아 다음 목적지를 기다리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생각은 나를 들었다 놨다- 기분도 오르락내리락했다.


퇴사 후, 어느 날은 어두운 독서실 책상에 스탠드 불빛 켜듯, 번뜩 내가 세상 최고가 된 것 같고 엄청난 자유를 얻은 것 같다. 더 넓은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더 잘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휩싸인다. 그러다 또 어느 날은 내 책상 위로만 쏟아지는 작은 불빛을 제외하곤 모든 게 캄캄한 어둠처럼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패배감이 밀려온다. 그럴 때마다 이탈리아 말펜사 공항에서 갈겨쓴 한 줄 메모를 기억한다.


문득 불안해도 “그래도 퇴사하길 잘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 후, 파리 한달살이에서 얻은 것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