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을 통해서 살펴본 이민문학에 대한 생각

이민자들의 글쓰기에 대한 단상

by 가제트

"김유정 소설"을 통해서 살펴본 이민문학에 대한 생각


그동안 여러 평론가들의 글을 읽으며 줄곧 생각해 오던 이민 문학-좀 거창한가요?-에 대한 생각들이 김유정 소설가를 통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합니다.

그 단상들을 나누어 보면서 브런치 회원님들의 생각도 아울러 듣고 싶은 마음입니다.


제 나름대로 김유정 문학에 대해 살펴보면,

제가 생각하는 그의 문학은 그 당시(1920~30년대) 문학의 세 가지 주류로 분류되던 이념주의와 심미주의 그리고 경향주의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체로 평론가들은 그의 문학을 현실에 기반을 둔 이념주의보다는 심미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해학에서 찾고 있습니다.

'향토적 해학성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상상적 현실을 새롭게 축성한다.(우찬제)' 또는 '토속적 해학의 세계이다. 고전 문학의 해학의 전통과 맥락이 닿으며 그의 해학이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정서 속에 맥맥히 흐르고 있는 정조를 포착하여 고향의 발견으로 확대된다.(김영기)'라는 평가는 김유정 문학에 대한 평론가들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제가 줄곧 생각해 오던 이민 문학이라는 틀을 덧입혀서 그의 문학을 새로운 각도로 해석한다면 우리의 문학적 성찰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고백을 하자면 가제트는 <봄 봄>하고 <동백꽃>은 오래전에 읽었다가 이번에 다시 한번 더 읽었고, 이 글을 쓰면서 <소낙비>(1935년 조선일보 당선작), <산골 나그네>(1933년 개벽사의 문예지 『제일선』에 발표), <금 따는 콩밭>등을 읽었습니다.

우선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소작인들입니다.

그리고 김유정이 그들의 고통을 보는 관점과 그것을 기술하는 방법은 다른 작가들과 상이합니다.

'심훈'이 <상록수>에서 보여준 계몽주의적 성격과도 판이하며 그와 자주 어울렸던 '이상'이 <날개>에서 찾고자 했던 존재론적 고통과도 구별됩니다.

그렇다고 같은 '구인회'의 회원이었던 '박태원'씨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보여주었던 반성적 의식을 통해 소외와 고통과 고독을 넘어가서 얻고자 했던 개인적인 진실의 추구와도 거리를 둡니다.


먼저, 김유정이 1930년대 같은 고향에 살고 있는 소작인들의 고통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입니다.

그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바로 위 형으로 인해 집안이 기울어서 서울의 누님 댁에 의탁하기 전까지 고향에서 농촌 운동-그리 거창한 형식의 계몽운동은 아니지만-을 하며 느낀 소작인들의 뼈저린 고통을 소설에서 비애와 동반하는 해학성으로 표현합니다.

그가 살았던 실레 마을이 소설 속에서도 실제적으로 등장했다는 점과 <응칠> <덕만> <덕필> <점순> <석순> 등 실레 마을의 실제 생존했던 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그의 고향에 대한 애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소낙비>의 <춘호> 같은 노름꾼에 난봉꾼도 등장하긴 합니다만...

그것은 도시 빈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현진건의 <빈처>라든지 김동리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패배자들의 유형과는 또 다른 주변인입니다.

그러한 주변인 중에서도 철저한 착취가 이루어진 주변부 중의 주변부에 대한 김유정의 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토착어에 대한 집착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인 '소월'이 그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준 민요에 대한 관심과도 어울립니다.

그가 그곳에 살고 있었기에 의당 사용 할 수 있었던 언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남긴 유산이기에 이민자인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며, 자주 지적받는 콩글리시가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문학에서는 새로운 문체 또는 소재로 사용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저의 생각입니다.

때때로 자조적으로 또 때로는 희화적인 방법으로만 쓰이는 콩글리시 또는 영어와 한국어의 복합적 결합은 김유정이 사용한 토착어 또는 사투리와는 질적으로 다르긴 하지만 언제라도 훌륭한 문학적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재를 떠나서 좀 더 본질적으로 접근하면 1세대 이민자는 의도된 변두리이며 2세대 이후부터는 태생적 변두리 또는 주변인이라는 설정입니다.

이 점은 문학사에서 주변부 문학의 중요한 논거가 되는 러시아 형식주의를 염두에 둔 생각입니다.

하위 형식이나 변두리 전통의 중심부로의 부상은 러시아 형식주의의 문학사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됩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해 설명하려면 방대한 논문이 되니 생략하고 간단히 중요한 것들만 나열하면

1) 문학을 문학이게끔 해주는 그 무엇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것을 주된 작업으로 삼았다.

2) 문학을 문학답게 만들어주는 것, 즉 문학성의 궁극적 기원을 문학작품의 내용이 아닌 형식에서 찾았다.

3)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혹은 estrangement)-너무나 친숙해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물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4) 스토리/플롯 논의를 통하여 문학을 비문학과 구별시켜 주는 문학 고유의 자질, 즉 '문학성'을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5) 플롯을 형성하는 것, 즉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것은 바로 자유 모티프들이다

6) 그 외 장치에서 미적 기능 등등...)


한국에 있어서는 김지하의 여러 담시를 비롯한 작품들이 변두리 전통의 승화가 이루어진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어로 쓰인 문학 작품에서 기존의 소재나 방법 또는 운율에 따르지 않고 모든 사용 가능한 것을 변두리라고 부를 때 이민 문학은 많은 재원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캐나다가 비록 모자이크 나라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민자로서 겪는 차별이 문학에서 얼마든지 중요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변두리적 삶이라고 볼 수 있는 그로서리, 식당, 세탁소 그리고 미용실 운영 등이 이곳에서의 이민자들의 삶에서 여전히 중요한 생계 방식임을 생각하면 그 일상을 세심히 관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묘사나 한국과의 생활과 비교했을 때 느끼는 괴리에서 오는 내면적 성찰을 통해서도 이민 작품은 훌륭한 문학적 성취를 달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더욱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보아야 할 대상은 이곳 원주민들입니다.

그것은 김유정이 관심과 애정을 보인 소작농들이 이곳에선 다름 아닌 그들 원주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방면에 대해서는 우리 한인들이 가진 지식이나 자료 또는 이해가 사실상 전무 한 상태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문인들의 단체가 의도적이라도 그들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백인들이 할 수 없는 영역인 이 문제를 다룬 중요한 작품이 탄생하지 않을까요?

제가 가지고 몇 안 되는 자료들을 분석하면서 그리고 김유정에 대한 글을 읽다가 메모한 몇몇 단상을 가지고 논리를 펼치려니 어떤 면에서는 견강부회한 것도 눈에 들어옵니다.

게다가 짧은 시간을 활용하여 중간중간에 쓰다 보니 문맥적으로 불충분한 것도 눈에 뜨입니다.

전문적인 비평 훈련을 받지 않고 쓴 것임에 대해 이해 바랍니다.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중요한 사항은 김유정이 가지고 있던 시각을 이민자들이 가지면 새롭고도 좋은 이민 소설, 수필 등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소원 같은 것입니다.

에세이적 글쓰기로 '제4의 문학'이 뜨고 있다는 평론도 있습니다.

시도 소설도 평론도 수필도 아닌, 서사가 해체되고 주체가 사라진 새로운 형태의 중간 문학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글쓰기의 형식이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자유로운 상상력만 가진다면 그리고 김유정이 보여준 소작인과 토착어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소위 이민자들의 문학 또는 해외문학이라고 부르는 변방에서도 훌륭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보면서......


김유정 초상사진(이투데이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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