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오마니
다른 친구들 엄마랑 비교해 봐도 예뻤고 젊었다. 고 1 때는 우리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같은 반 친구가 젊은 여자가 나를 찾는 걸 듣고는 “야, 니 누나 왔어” 한 적도 있었다. 카투사 출신인 아버지와 연애할 때 주 무대(?)가 워커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고등학교 수학여행 가기 전에 친구들에게 꿀리지 말라고 정통 트위스트를 가르쳐 주셨다. 경주의 한 호텔 옥상에서 야밤에 야전 틀어놓고 오마니가 전수한 트위스트로 친구들을 압도해 버린 건 물론이다. 오마니는 트위스트를, 난 고고를 서로에게 가르친 건 우리 사이가 모자지간이 아니라 그때만큼은 친구지간으로 서로가 아는 걸 나누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엄마지만 때로는 친구처럼 또 때로는 누나처럼 지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폭삭 망해서 수유동에서 빨래 꼴 산꼭대기 집의 방 한 칸에 세 들어 사는 동안은 집안의 가장이 되어 남대문 시장 한 편에 터를 잡으시고 조금씩 집을 일으키셨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신 덕에 대학교에 들어갈 때쯤 다시 수유동으로 내려오면서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군대 가기 며칠 전 “친구들 다 불러” 하셔서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 30명 정도 불러서 1박 2일 동안 거하게 파티를 여셨다. 아들이 군대 가기 전에 오마니로서 노래 한 곡 불러 주고 싶다고 하시곤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부르시며 눈빛이 살짝 반짝이는 걸 보고 술 몇 잔을 좍 들이켠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나와 또 내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늘 젊게 사셨기에 난 오마니와의 세대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하였다. 이민 오기 전 오마니와의 추억을 하나 더 마련하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쎄시봉”특집 무대를 같이 관람하면서 송창식, 윤형주 등에 대해 수다를 떨 수 있었던 것은 오마니가 모아 놓은 도넛 레코드 판을 통해 60년대 팝송과 폴 모리아 경음악을 같이 들으며 자란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런 친구 같은 오마니와 어쩔 수 없이 이별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5월 8일-그 날짜가 하필 어버이 날이었다-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 가족과 가까운 친지, 친구들이 공항에 작별하기 위해 모였다. 다른 사람들과는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덕담도 오고갔지만 오마니의 그 촉촉한 눈망울을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포옹도 못하고 간단히 작별 인사만 나누고는 기내로 들어갔다. 터져버릴 것만 같은 마음이 포옹으로 폭발할 것을 미리 알있음이리라. 오마니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으시고 “잘 살아라” 이 한마디로 모자지간 아니 친구지간의 작별은 끝났다.
그러나 그렇게 떨어져 산 지 십 수년이 흐르면서, 비록 두 번의 방문과 부모님의 한 번의 캘거리 체류로 잠깐 동안 만나긴 했지만, 예전 같은 자잘한 수다는커녕, 모자간의 대화는 짧은 국제 전화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시차로 인해 자주 불발되었다.
그러던 차에 6년 전 봄, 아내의 고국 방문 때 아내가 오마니에게 스마트 폰을 해 드리면서 나와 카톡을 하게 되었다. 카톡에 뜬 첫 문장을 보는 순간 난 목이 메어왔다. 그리고 몇 문장 치면서 마무리를 하게 되었는데 역시 오마니의 마무리는 14년 전 공항에서 이별할 때처럼 쿨했다.
“엄마랑 카톡 하게 돼서 아들 무지하게 기분 좋아”
“나도 기쁘다. 오늘은 이만 끝”
난 목이 메다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로 88세.
손으로 치는 타자가 서툴러 자주 글자들이 틀리지만 이젠 이모티콘은 물론이고 좋은 기사가 있으면 링크를 걸어 보내기도 하는 아직 젊게 사시는 우리 오마니.
물론 한 쪽 눈은 시력을 거의 잃어버리시고 무릎 관절도 안좋아 고생하시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낭낭한 가제트의 영원한 엄마 오마니.
며칠 전에는 아래 사진과 같은 것도 캡처해서 보내주셨고, 오늘은 40년 경력의 일본 암 전문 의사 "곤도 마코토"의 충격 고백이라는 제목의 동영상도 보내주셨다.
가제트는 이렇게 답을 보냈다. ‘엄마 아들은 기쁘다. 오늘은 이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