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어언 24년째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TV 앞에서 Be the Reds! 가 적힌 빨간 티를 입고 황선홍 선수를 응원하던 중학생 애옹이는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서 무쌍에 된장찌개 같은 구수함이 매력적인 남자와 결혼도 하고, 매일 만원인 전철에 몸을 싣고 출퇴근을 하며 직장에 다니는 삼십 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2002년, 그때부터였다. 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게.
사실 일기 쓰기의 역사를 말하자면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 또래들은 초등학생 때 대부분 썼을 그림일기부터, 방학 동안 선생님께 검사받을 일기를 쓰는 등(개학 전날 밀린 일기를 몰아 쓰며 일기가 소설이 되는 기이한 경험을 했었죠) 어쩐지 제법 꾸준하게 일기를 써왔다. 하지만 아날로그 형태의 일기장은 휴대가 쉽지 않고, 떠오르는 글자들을 지면에 바로바로 옮기길 내 머리는 희망하지만 손가락이 미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문제로 인해 쓰다 말다 하다 보니, 결국 나 혼자만 쓰는 비공개 카페를 만들어 속마음을 털어놓는 웹상의 일기장을 만들게 되었다. 연도 별로 게시판도 따로 만들어 정리해 두는 등 나름의 규칙을 갖고 꽤나 공들여 유지해 온 카페였다. 무엇보다 나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보안성' 측면에서 탁월했다.
그렇게 거의 1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열심히 썼더랬다. 하지만 숫기는 없는데 수줍음, 피해의식, 세상을 향한 반항기는 가득했던 사춘기 그 철없던 시절에 쓰인 일기가 과연 정상적인 글의 형태를 띠었을까?
아래는 비공개 카페에 썼던 일기를 삼십 대가 되어 다시 읽었을 때의 그 참담한(?) 심정을 담아 썼던 일기의 일부다.
성인이 된 후 카페에 일기를 쓰지 않고 수기로 적는 일기장을 사용하면서 카페에 그동안 적어두었던 일기는 잊고 살았다. 아니다. 사실은 노골적으로 피했던 것이었다. 읽으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기 싫어 일부러 열어보지 않았다.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이상한 모양의 이모티콘과 욕을 섞어가며 그냥 기분 푸는 용도로 썼던 일기들이었다.
하나하나 정독을 하는데(정말 힘들었다)... 와. 피해의식도 그 정도면 정신병 수준이다. (ㅋㅋㅋㅋ)
어쩜 그렇게 노력이라고는 쥐뿔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 탓, 남 탓만 하고 살았는지. 정말 처참하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며, 화가 나고, 슬프고, 우울했는지. 몇 년에 걸쳐 적힌 것들 중에서 좋았던 이야기, 행복했던 날들을 적은 일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긴,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면 일기장 같은 데에 내 속마음을 적을 일이 없었으려나. 대게 기분이 안 좋을 때 어딘가로 쏟아내고 싶은 법이니까.
뭐, 괜찮다, 다 괜찮다.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안 살면 된다. 그땐 단순히 '사춘기, 제2의 탄생기, 질풍노도의 시기'였기 때문에 그랬던 거다. 그 당시에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음. 적어도 퇴보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을...
......
결론적으로, 현재는 심적으로 몹시 자유로워진 상태다.
10대 후반, 남들에게 휘둘리며 툭하면 상처받고 외로워하고 자책하고 자존감 바닥이던 내가 아니라, 주변의 시선에서 한결 자유로워지고, 내 의견을(그나마)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내가 되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성격이 변해버렸는지 나도 알 수 없다. 그냥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나의 내면에는. 내가 자란 K라는 도시, 내가 졸업했던 학교를 떠올리면 친구들과의 즐거웠던 추억이 아니라(따돌림을 당했던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상처와 눈물과 분노로 가득했던 그 당시의 내가 떠올라 쓸쓸한 감정이 먼저 온다. 대부분의 주변인들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학교 다닐 땐 이랬는데, 저랬는데 하하 호호 추억들을 이야기하는데 난 그게 잘 안 된다.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곧 나의 과거이므로 이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풀리지 않는 한 평생을 꼬리표처럼 내 뒤를 따라다닐 것만 같다. 과거도 곧 나인데. 내 모든 모습을 끌어안고 함께 가야 하는데, 잘 안 된다.
일기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상처, 슬픔, 분노가 10대 후반 내 일기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전히 예민하지만 그때는 더 심해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악의 없는 자극들을 쳐낼 힘도 없었던 시기였다. 그때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가끔, 그리고 여전히 나를 흔든다.
몇 년 전 다음과 카카오의 계정 통합이 있었다. 2002년 다음에서 비공개 카페를 만들어 일기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던 그 계정은 알고 보니 부모님의 명의였다. 당연히 내 명의라고 생각하고 써왔는데 아니었다니...(?!)
이후 계정 통합 과정에서 본인 인증 정보가 일치하지 않아 통합이 불가능했고 그 일기들은 결국 나의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사실 고객센터에 문의하고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하는 등 이런저런 시도를 한다면 복구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제는 예전처럼 일기를 자주 쓰지 않는다. 사는 게 바빠서... 는 아니고. (결국은 귀차니즘의 결과물)
일기는 여기저기 흩어져 다양한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어린 왕자가 그려져 있는 몰스킨 노트, 블로그, 아이폰 메모 앱, 데이그램 앱, Google keep...
죽기 전(갑자기 숙연...) 이루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면 그건 흩어져 있는 일기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든 뒤 소장하는 것이다. 음, 그런데 내가 죽으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읽히게 될까. 난 아이가 없으니 물려줄 사람도 없는데. 그걸 읽을 누군가는 애옹이라는 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까. 별로 재미는 없으려나. 아니지, 누군가에게 읽히느니 그냥 죽기 전 불태워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차피 불태울 거면 뭐 하러 책으로 만들어... 주절주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