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삶 3
우리 엄마는 딸 다섯 중 넷째. 딸 부잣집에서 태어난 네 번째 딸로서, 막내만큼이나 위 언니들의 사랑도 받고 부모님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고 한다. 그런 엄마에 대해 할머니는 어린 나에게 '너희 엄마보다 약삭빠르게 도망가는 딸은 없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할머니가 혼내려고 빗자루에 손을 뻗기도 전에 벌써 저 멀리 도망가서 할머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딸이 다섯이라는 것은 다르게 말해 하루도 집에 바람 잘날 없이 시끄럽다는 이야기. 언니들끼리 옷으로 싸움을 하거나 몰래 가게에서 외상으로 군것질을 사 먹거나, 숨겨둔 귀한 반찬을 먹다 걸리는 소소하지만 혼날 일들이 매일매일 가득하는 말이다. 할머니는 매일 그런 딸들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주로 빗자루를 들어 매타작으로 기강을 잡았다. (옛날에는 체벌이 아무래도 흔했다.)
엄마에게 혼날 때면 딸 다섯의 반응은 각기 달랐는데, 큰 이모는 그중 가장 혼나지 않는 딸이었다. 아무래도 맏이다 보니 오히려 엄마의 편에 더 가까웠을 것 같다. 둘째 이모는 도망가면 동네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창피해서 가만히 맞고 있는 편이었고, 셋째 이모는 (엄마의 말에 의하면) 바보 같은 편이라 혼날만하니 혼난다고 생각하고 가만있었다고 한다.
막내 이모조차 할머니가 화내면 순순하게 혼나는 편이었는데, 할머니는 빗자루로 그런 딸들을 때리다가도 너무 가만히 맞고 있는 딸이 안쓰러워 일부러 손으로 대문 쪽으로 밀면서 때렸다고 한다. 차라리 도망을 가라며 슬쩍슬쩍 밀며 눈치를 줬지만 둘째와 셋째는 미동도 없이 혼나고 맞고만 있어서 할머니가 먼저 지쳤다고 한다.
순순하게 혼나는 딸들과 다르게 엄마는 할머니가 화내는 타이밍을 잘 보다가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손이 빗자루를 쥐려고 하는 그 순간, 이미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고 한다. 도망을 멀리도 가지 않고 할머니가 쫓아오지 못하는 거리 내에서 할머니를 약 올리듯 눈치를 살살 보다가 쫓아가면 다시 도망가고, 포기하고 뒤돌면 다시 쫓아왔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보면서 씩씩거렸지만 엄마는 오히려 눈만 더 동그랗게 뜨며 할머니 눈을 똑바로 봤다고 한다.
어찌 보면 참 엄마답다고 해야 하나, 왠지 당당하게 혼나고 뺀질거렸을 어린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는 아직도 이 이야기를 하면서 배를 잡고 웃는다. 딸 다섯 중에 엄마만 유일하게 별종처럼 할머니에게 당당하게 구는 딸이었고, 혼내도 기죽거나 반성의 기미 없이 저녁 준비하는 할머니의 옆구리에 붙어 맛있는 반찬을 가장 먼저 맛보는 딸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런 엄마에게 '나중에 시집가면 너랑 똑같은 딸 낳아서 고생해라'라는 저주의 말을 하곤 했고, 물론 나는 엄마처럼 대담하게 약삭빠르진 않지만, 엄마보다 조금 더 고집 센 고집쟁이가 되어 가끔 엄마를 이기거나 엄마의 모든 일에 참견을 하곤 했다. 엄마의 표현으로는 '나보다 조금 더 한 딸이 태어났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도 하니, 이거 참 결국 웃을 수 밖에 없다.
우리 엄마는 얄미울 만큼 뻔뻔한 딸이지만 할아버지의 품에 가장 오래 안겨있던 딸이었고, 늙어서는 가장 의지되는 딸이었고, 현재 유일하게 매년 제사를 챙기는 딸이니 어릴 때 고집부린 것 정도는 이제 잊지 않았을까. 엄마는 옛이야기를 할 때면 늘 할머니를 그리워했는데, 어린 날처럼 많이 혼나도 좋으니 다시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꿈에서라도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엄마와 딸의 관계란 참... 어떤 말로도 정의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