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으로 간다. 내 집은 원룸촌 7층짜리 건물의 302호.
삐, 삐, 삐, 삐.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깜깜한 자취방의 불을 켠다. 라면을 끓인다. 라면은 설거지도 줄일 겸 냄비째 상 위에 놓는다. 두 눈은 텔레비전에 고정한 채 면발을 후후 불어가며 조촐한 저녁식사를 한다. 나는 라면을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 냉장고 속 엄마의 김치를 꺼내온다. 아삭한 김치를 한 입 베어 물고 라면 국물 한 숟갈을 곧장 꿀꺽한다.
내 자취방 냉장고에는 늘 찐한 김치 냄새가 났다. 엄마는 내가 본가에 갈 때마다 김치를 새로 담가 놓으셨다. 자주 본가에 가지 못할 때에는 한 가득 담아 택배로 보내셨다. 아직 다 못 먹은 김치들이 남아있으니 보내지 말라 해도 생김치가 맛있지 않냐며 또 보내주셨다. 그것이 엄마의 사랑방식이었다. 그리움의 표현이었다.
다 커버린 자식들, 당신의 품을 떠난 자식들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김치였다.
한번은 오랜만에 본가에 갔는데 엄마가 동치미를 담가 놨다고 먹어보라며 꺼내 온다.
“아빠는 이렇게 맛있는 김치를 매일 먹는 거야? “
“엄마 김치가 그렇게 맛있니?”
내 농담에 엄마가 방긋 웃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 엄마 김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요리실력이 들쭉날쭉해서 먹는 우리에게 늘 긴장감을 안겨주었던 엄마였다.
20대 후반, 직장생활 하다가 남들 다 가는 나이에 시집와서 처음 해봤을 살림. 본인의 꿈은 잠시 내려놓은 채 주부가 되는 것이 당연했던 그 시절. 우리 엄마 역시 그랬다. 엄마는 광고회사 디자이너였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주부가 되었다. 집안일은 어설펐지만 열심히 배우고 노력했다. 가족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이 그녀의 행복이었다. 그러다가 일을 다시 시작했다. 매일 안양에서 반포를 출퇴근하며 프로 주부이자 프로 작가로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시절을 보내며 그녀는 그녀의 무르익은 김치 맛만큼이나 깊어졌다.
나는 세상에서 우리 엄마 김치가 제일 시원하고 맛있다. 그중에서도 파김치가 제일 맛있다. 여름이면 만들어주는 열무김치도 별미이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소면을 삶아 매실청과 식초, 고추장을 슬쩍 넣고 참기름 한 방울에 비벼 먹어도 참 개운하다. 한입 베어 물면 그 깊이 있는 맛에 감동하게 된다.
오늘도 엄마가 보내 준 김치와 몇 가지 밑반찬을 꺼내 식사를 하다가, 엄마의 김치는 왜 이렇게 맛있을까 생각해본다. 그동안 희생하며 가족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엄마의 삶이 김치에 담겨있는 탓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