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동안 SNS에 적어댔던 글들에 대한 항변
초등학교 시절 나의 일기 역시 선생님의 검사를 받았다.
간단한 코멘트 옆 묻어있는 볼펜 똥, 그 밑에는 선생님의 남색 도장.
선생님이 뭐라고 적어주셨을까? 숙제 검사가 끝나고 펼쳐보는 일기장엔 항상 긴장과 설렘이 감돌았다.
나의 생각, 나의 감정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처럼 긴장과 설렘이 연속하는 즐거운 일이었다.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을 글로 쓰고 또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과정.
그 과정 속의 즐거움은 생각보다 어린 시절부터 경험해오던 감정이다.
나는 성인이 되었고 아직도 다이어리에 일기를 쓴다.
어린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읽어줄 선생님이 없다는 것. 검사받는 글이 아니기에, 그래서 더 찌질하고 솔직하다. 돼지 같은 나에 대한 혐오라던지, 나 정도면 이쁜 편이라는 자뻑이라던지, 사랑에 실패한 인간의 슬픔에 대해라던지, 사랑에 빠진 여자의 푼수 같은 감정이라던지, 싫어하는 인간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욕이라던지, 그리고 이내 찾아오는 그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용서라던지..차마 누구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보여주기도 싫은 적나라한 나의 심정.
그렇게 나는 글을 쓰고 있지만
글을 쓰지 않는 상태가 되어갔다.
나만 볼 수 있는 글을 쓸수록 나의 글은 초등학교 시절 검사받던 글보다 더 후진 잡소리가 되어간다.
여기에 우리가 SNS에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SNS에는 선생님 대신 다수라는 이름의 감시자가 존재한다. 내 글이 어느 곳 누구에게 까지 읽힐지 모른다는 긴장과 설렘이 존재한다.
다수라는 이름의 감시자는 좋은 글을 쓰고자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의식의 흐름대로 쓴 잡소리가 아닌, 나름의 논리와 설득력을 가진 글. 감시자들의 좋아요 즉, 타인의 인정과 공감의 행위를 이끌어 내기 위해 우리의 글을 더 논리적이고, 더 핵심을 찌르고, 더 공감할 만한 내용으로 다듬는다.
우리는 다수라는 이름의 감시자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 연락 안 하는 예전 남자친구, 일 년에 한 번도 못 보는 6촌 언니, 초등학교 때 절교한 단짝 친구가 내 글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쓰고 이를 업로드할 때 긴장하고,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렌다.
그 사이에 우리의 글은 우리의 감정과 생각들은
더욱 깊어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라 믿는다.
더욱 다듬어질 것이며 더욱 냉철해질 것이다.
나름의 논리구조도 가지게 될 것이다.
그저 일기에 불과한 생각과 감정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상에 올려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은 어쩌면 어린아이의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아주 당연하고 본능적인 것 아닐까. 우리의 글이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재미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것 아닐까.
'일기는 일기장에 쓰시고요'하면 '싫거든' 하고 외치자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SNS에 당당히 올리자
무엇을 써야 할지
소재도 없고 깊이도 없지만
수줍게 브런치를 시작하려 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