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사와 인하우스에서 일을 하며 운이 좋게도 수많은 디렉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일을 할 수 있었다. 팀으로서 일할 때는 자신의 손발이 됐으면 하는 디렉터, 해답을 함께 찾아가는 디렉터, 직감을 밀어붙이는 디렉터, 공유를 하지 않는 디렉터 등 일하기 편한 분들도 불편한 분들도 있었고, 인하우스 디렉터로는 요점만 잘 말하는 디렉터, 정리를 잘하는 디렉터, 대행사에 의존하는 디렉터 등 별의별 디렉터들을 볼 수 있었다.
평생 좋은 리더도 나쁜 리더도 없다곤 하지만 우습게도 좋아지는 리더보다는 나빠지는 리더들을 더 많이 만났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처럼 상황이 달라지기에 리더가 변화하는 걸 수도 있다. 다만 리더의 변화는 늘 나쁜 쪽으로 흘러갔다. 일을 하기 힘들어지고 문화가 달라지며 많은 분들이 일의 노선에서 벗어났다.
이번 글은 좋지 않은 디렉터(리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신기하게도 내가 만난 나쁜 디렉터는 하나 같이 일을 못했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여러 감정적인 문제로 negative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단순히 디렉터에 대해 불평하는 글이 아닌 모두가 언젠가 리더가 되어야 하기에 그런 리더가 되지 않기 위한 글로 봐줬으면 하다.
직감이 뛰어난 리더는 자신의 경험과 디테일을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대성공 또는 대실패로 이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리더들은 뛰어난 직감을 갖고 있었다. 뛰어난 직감만큼이나 거기에 따라오는 결과도 책임질 수 있는 단단한 리더였다. 하지만 모두 다 그런 리더는 아니었다. D는 일은 못하지만 말은 뻔질나게 잘하는 사람이었다. 짙은 딥디크 향수에 단정한 옷차림 그리고 화려한 말솜씨, 첫인상이 좋은 디렉터였다. 킥오프 미팅만 되면 많은 클라이언트들이 그의 혀에 매료됐다. 그는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며 디자인 전문용어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았으며, 클라이언트에게 통 크게 베푸는 리더였다.
그는 클라이언트의 자료를 보지 않고 자신의 직감만 믿고 생각을 쏟아냈다. 그가 내는 아이디어는 논리가 없어 빈틈 투성이었다. 자존심도 얼마나 쌘 지 팀원들이 좋은 방안을 들고 와도 비난과 지위로 손쉽게 뭉게 버렸다.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 내가 알아. 다 경험해 봤어.” 이 마법의 말 한마디면 모든 아이디어가 휘발됐다. 그러다 보니 그녀와 함께하는 프로젝트마다 문제가 생겼다.
직감으로 일하다 보니 매번 말이 바뀌어 팀원들이 밤새는 건 당연했으며, 논리 없는 빈말은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수 없었다. 직감으로 일하다 보니 설득을 위한 장표보단 장황한 말로 가득 찬 긴 보고서가 많았다. TF도 클라이언트도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와 꾸밈 말로 가득 찬 장표, 결국 아무도 설득할 수 없었다.
직감은 실질적인 디자인 사고를 설명하기에 너무 간단한 용어이다. (생략) 디자인 논리는 어떤 활동의 목적이나 기능 그리고 그 목적을 충족시키는 대상의 적절한 형태 사이에서 생각을 바꾸거나 전달하는
수단이다.
- 나이절 크로스, 『디자이너의 일과 생각』, 안그라픽스
그런데 좀 성가시지만, 나는 그 직감으로 정한 일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재검토하는 버릇이 있다. 뭔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처음에 직감으로 내린 결론으로 다시 돌아간다. 지금까지 직감으로 살아왔다고 큰소리 떵떵 쳐놓고는 매번 그렇다. 정확하게는 직감으로 결정한 일은 반드시 의심하고 백지로 돌렸다가 원래 대답으로 다시 돌아간다.
- 나가오카 겐메이, 『디자이너 마음으로 걷다』, 안그라픽스
그렇다 보니 제2의 클라이언트라는 말이 생겼다. TF는 그 사람 입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고 클라이언트의 상황과 브랜드를 위한 솔루션은 2순위 었다. 항상 1순위인 디렉터의 직감과 고집을 이행하기 위해 모두 노력했다. 매일 밤을 새웠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우선순위가 달랐기에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었다.
눈앞의 대처에만 열중하다 보면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기 쉽다.
- 스즈키 에이치, 『베리심플』, 더퀘스트
하지만 최악인 부분은 책임감이었다. 직감으로 아이디어만 뱉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직원들 등 뒤로 숨어버리는 그 사람과 일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일에 진전이 없을 때는 함께 일하는 기획자가 내 말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에라고 말하고, 클라이언트가 난색을 보일 때는 디자이너들이 열정이 과해 의중을 맞추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역시 이래서 말을 잘해야 된다고 말하는 걸까, 그는 이리저리 남의 탓을 돌리며 책임을 회피했다.
에이전시의 필수요건은 무엇일까? 일정에 맞춰 분석과 해답을 제시하고 클라이언트의 만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 디렉터와 배를 항해하면 우리는 항상 침몰했다. 거친 풍파에 닻이 부러지거나 갑판이 뜯어졌다. 아니 TF가 자멸했다. TF는 피폐해졌으며 모두 프로젝트가 도중에 사라지거나 어떻게든 끝났으면 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한 명씩 이탈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녀와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녀도 점점 위축되어 팀에서 사라졌다.
원래 그는 실력이 없지만 직원들을 믿고 ‘성공’을 만드는 디렉터였다. 그의 스타일은 직원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모두가 책임감을 갖고 프로젝트의 최선의 결과를 만드는 유능한 리더였다. 하지만 사람을 잘 다루는 디렉터인 만큼 자신의 눈에 한번 엇나가면 사람을 쉽게 바보로 만드는 디렉터였다. 문제는 그의 말과 태도에서 시작됐다.
결과물이 좋은 만큼 좋은 디자이너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조직은 커졌지만 사람들이 하나로 연결되지 않았다.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생각은 일치하지 않았고 팀원들의 말수는 줄어갔다. 한 명 한 명씩 퇴사하기 시작하더니 회사 분위기는 점차 냉랭해졌다. 왜 이렇게 사람들끼리 뭉치지 못할까? 알고 보니 유능한 디렉터이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디렉터는 항상 불안해했다. 잘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매번 지친 기색이 완연했고 감정 표현도 없었다. 추후 알고 보니 자신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고 하였다. 조직은 커져가고 있는데 자신의 디자인 능력은 팀을 받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말로 분열을 일으켜 직원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프로젝트가 잘못되면 리더 탓을 하고 여러 이유로 퇴사를 하면 일을 못하는 사람이 나갔다는 등 여러 루머를 퍼트렸다.
파국으로 닿은 것은 모두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의 불합리함을 알고 나서부터다. 사람들은 그와 대화하는 것을 즐기지도 않았고 모두 쉬쉬했으며 조심했다. 그러다 보니 혼자 고립됐다. 고립은 외로움으로 번졌고, 매일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공간의 분위기를 어지럽혔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남에게 상자를 덮어씌울 때는 별생각이 없지만 내가 남들이 씌운 특정한 상자에 갇히고 나면 그제야 답답하고 부당하다는 생각까지 든다는 점이다.
- 류승연, 『배려의 말들』, 유유
냉랭한 분위기, 분열되는 팀 등 그 디렉터는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처우가 잘못됐다며 팀을 떠났다. 신기하게도 디렉터 한 명이 바뀐 것뿐인데 팀은 뭉치기 시작했고 프로젝트는 성공의 궤도를 달렸다. 좋은 디렉터도 밑천이 드러나면 끝이 나는 것을, 훌륭한 디렉터로 만든 자신의 능력을 잘못 쓸 수 있는 것도 배웠다. 이렇게 회사는 다음 단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Director, 속해있는 산업의 일을 기획하고 계획 및 연출을 총괄하는 사람이다. 일을 총괄하는 사람에게는 권한에 따른 책임이 있다. 그리고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일을 진두지휘한다. 그렇기에 회사는 좋은 디렉터를 채용해야 하고 creative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좋은 디렉터가 돼야 한다. 좋은 디렉터는 일을 성공으로 이끌고 팀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그런 사람 주위에는 유능한 사람들이 있고 일을 이행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하워드의 선물에서 C급 관리자는 팀원을 C급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당신은 당신을 A급으로 만드는 디렉터와 일을 하는가 아님 당신을 C급으로 만드는 디렉터와 일하는가? 만약 당신이 디렉터라면 당신은 함께 일하는 사람을 A급으로 만드는 디렉터인가? 나쁜 리더가 되지 않기 위해 한번쯤 자문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A급 관리자는 A급 직원을 채용하고, B급 관리자는 C급 직원을 채용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군요. C급 관리자는 팀원들을 C급으로 만든다고 말입니다.
- 에릭 시노웨이, 메릴 미도우, 『하워드의 선물』,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