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경제 같은 소리 하고 있네(4)
12월 마지막 주는 경북과 경남을 오가며 2016년 마지막 과업(?)을 마무리하는데 보냈다.
'써야지, 써야지...'
블로그든 브런치든 쓰고 싶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산더미지만 바쁜 일정 핑계로, 본인 게으름 탓으로 SNS를 거치며 짤막한 단상 정도나 끄적였을 뿐이다.
컨설팅이나 멘토링을 진행하면 사실 본인이 얻는 게 더 많은 것 같다. 가르치면서 더 잘 이해되 듯, 나를 돌아보게 되고 정리하게 된다. 이 자리를 빌어 컨설팅하는 제게 더 큰 가르침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얽히고설킨 얘기들은 차차 풀기로 하고 오늘은 농촌에서 만난 훌륭한 여성 사업가 두 분을 소개하려 한다.
2016년 한 해 동안 별별 일이 많았지만 쓰레기를 상대하려면 나도 적당히 구정물을 묻혀야 한다는 거였다. 괴물을 상대하다 괴물이 되지 말자고 하지만 괴물이 되진 않더라도 최소한 무기 장착하고 연장은 챙겨야 되지 않겠나? 상대가 오물 잔뜩 묻히고 전투태세로 달려오는데 혼자만 백조 마냥 고고한 것도 TPO에 맞지 않는 것 같고. 적당히 검댕 좀 묻히고 위장 크림 정도는 미리 발라줘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애당초 까마귀 노는 곳엘 가지 말아야 할 텐데 이미 창업이란 걸 해서 진흙탄 정 중앙에 뛰어들었는데 누굴 탓하리? 다 본인 업보려니 해야지.
그러나 사업하며 상대하는 사람 10인 중 10인이 전부 진상이라면 아무리 나라고 버틸 수가 있간디? 진흙탕서 구르다 보면 진주도 발견하고 원석도 캐기 마련이다. 특히 농촌 쪽은 남자들이 대부분이고 지리적, 역사적, 관습적 특성상 도시에서 대하는 사람들 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 권위적, 폐쇄적이기 마련이다. 여성들이 사업하는 경우 대부분 남편 혹은 가족과 함께 하며 보조적 역할에 머물거나 가내 수공업 정도의 규모나 비전이 대부분이라 원대한 포부를 가진 여성 창업가를 만나기를 오랜 시간 기다려 왔으니,
이 불모지에서 내가 만난 두 여성은 나에게 참으로 보배와 다름없음이라...
"미녀농부"를 표방하며 경북 상주에서 스토리 농업을 꿈꾸는 이정원 대표님과
25년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농촌6차산업의 롤 모델을 제시해 준 "이수미팜베리" 이수미 대표님,
내 비록 "외로움과 고독은 대표의 천업(天業)"이라는 걸 공개 멘토링 자리에서 외치는 굳센 녀성이나 대한민국 하늘 아래 어딘가에 동지가 살아 숨쉰다는 사실은 이런 나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준다.
상주에서 미녀농부 이정원 대표를 만나 거창으로 향했다. 상주 도착과 세무서 업무가 생각 보다 늦게 끝나 벌써 저녁 6시가 넘었다. 2시간 남짓 걸리는 거창 도착해서 밥을 먹자니 민폐일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먹고 출발하자니 도착하면 9시가 넘을 것 같아 이수미 대표님 뵐 시간이 너무 짧고,
답이 없을 때는 이해당사자 혹은 관계자와 의논을 합시다!
팜베리로 전화를 하니 왜 이렇게 늦게 연락했냐며 김치 밖에 없어도 괜찮냐는데 찬밥도 괜찮노라 대답하고 미친듯이, 아니 속도제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휴게소 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고 화장실도 꾹꾹 참은 채 다시 가속페달을 밟았다.
어두운 밤 겨울 시골길은 스산하다.
결국 길을 잘못들어 남의 집 앞마당서 차를 다시 돌려 내려왔다. 예전에 강원도 오지 갈 때도 몇번 겪고 이번에도 겪은 일이지만 농촌에서 길 찾을 땐 네비게이션 보다 현지 주민의 말, 표지판에 의지해야 한다. 강원도 정선 갈 때는 동강 건너를 잘못 표시해 준 네비놈 땜에 결국 평창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가는 불상사 마저 생겼었다. 이번에도 표지판 보고 그 길로 들어섰어야 하는데 네비 녀석이 자꾸 틀린 길이라는 바람에 좁아터진 비탈길을 후진해서 다른 갈래길로 갔다 가로등 하나 없는 외길에서 귀신 만날 뻔했어 -_-;;;
아앗, 이거이 김치뿐인 밥상이 맞나요?
가리비찜에 생굴, 오리 두루치기에 신선한 채소들, 게다가 직접 농사지은 복분자로 빚어 2년 숙성한 와인!
도착하니 8시를 5분쯤 남겨놓은 시각.
6시간 운전한 피곤은 어디로 가고 11시 넘도록 세 녀자는 수다 잔치를 벌였으니...
20대 1인, 30대 1인, 40대 1인은 세 여성은 세대를 초월하며 그간의 고군분투에 대해 하소연, 남 모르는 가슴앓이, 한편으로 우리끼리만 나눌 수 있는 공감대 형성으로 하얀 밤을 불태울 뻔했으나 새벽같이 부산으로 농협과의 MOU 체결을 위해 출발하셔야 할 이수미 대표님과 한나절 운전에 신경 치료 중인 치아 탓에 넉다운 된 본인의 체력 고갈로 자정을 앞두고 숙소로 들어왔다. 언덕배기에 그림같이 지어진 펜션에서 정원 대표와 일 얘기 겸 달님 보고 2차라도 할까 했으나 HP고갈로 그대로 꿀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20년 RPG 게임에서 변하지 않는 공식 아닌 공식!
HP 고갈엔 답이 모다? 여관에서 잠 자기죠~
대여섯 평 남짓, 복층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아기자기하면서 아늑하다. 주방과 침실이 아래 위층 별도로 구분되어 있고 화장실과 샤워실이 각각 분리되어 있어 누군 볼일 보고 누군 씻을 수 있다. 급할 땐 화장실이 두 개인 셈(ㅋㅋㅋ). 친구들끼리 친목으로 와도 좋고 동료들끼리 워크숍을 와도 어색하지 않게, 불편하지 않게 보낼 수 있도록 주인장과 설계인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인간이란 본데 혼자 있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리고, 고독이란 사회적 동물이 영원한 딜레마이며 특히 사업 초기엔 정신없이 시간이 후딱 지날 때가 많은데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이 육체와 정신, 영혼까지 고갈되고 만다. 이럴 때 비상식량 잔뜩 싸 짊어지고 만화책, 게임, 노트북, 아이패드 들고 와서 2박 3일 내내 멍 때리다 가끔 좋은 공기들이마시고 시간 가는 줄 모르다 해 지면 자고 해 뜨면 일어나 산책 살짝, 지친 심신을 도모하기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랄까?
나란 인간이 원래 지방 출장 다니며 양조장 숙소에서도 자고 처음 만난 양조장 사장님네 넉살 좋게 재워달라며 한국이건 외국이건 편하게 쏘다니는 인간인데 이수미 대표님네도 역시나 너무도 허물없이 편하게 대해 주셔서 세 번째 가면 아마 세수도 안 하고 겨울에 가장 사랑하는 잇템, 하트 땡때 수면바지 입고 활개치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아, 사실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새벽에 이미 해 버려...ㅅ...)
전면 통유리에 동향으로 지어진 덕분에 태양의 기운에 호랑이 힘이 샘솟으며 알람 없이 기상이 된다.
어쩌다 보니 계속 겨울에 오게 되었지만 올해 모기가 활개치기 전, 따뜻한 봄날이나 초여름 즈음엔 문 활짝 열고 테라스에서 복분자 와인 한잔에 분위기 한번 잡아보고 싶어라~
어...어제...밤
부...분명히 그냥 빵 쪼가리 밖에 줄 게 없다고 하...하셨는데.......
정원 대표 꼬셔서 세수하지 말고 우리 일출보며 커피나 한잔 마시자며 수면바지 입고 쭐래쭐래 까페 내려갔더니 새벽에 출장 준비 하느라 바쁘셨을 텐데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
(나 출장갈 때도 밥 먼저 안 차려 주는 우리 남편 보다 낫네욤 -_-ㅋ)
이틀 간 상주세무서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싸악 - 해소되고 오염된 영혼까지 맑아지는 융숭한 접대, 아니 대접이었다. 씨앗까지 통째 갈아 직접 만든 달지 않아 더욱 맛있는 베리 잼, 요거트에 담긴 베리 시럽과 냉동 생과, 복분자 샐러드까지 커피 한잔 내려 마시러 갔다가 너무 감동 받아서 미녀농부 정원 대표랑 부둥켜 안고 눈물 찔끔 흘렸다. 사실 농촌에서, 또 농촌을 현장 삼아 일하다 보면 보편적인 도시의 어려움과 또 다른 벽에 부딪히게 된다. 여성으로서 남성 중심 기득권 사회에서, 특히 폐쇄적이고 고립된 농촌 사회의 보수성과 마주치는 건 일상이며 아마 상대방은 인지하지도 못할 빈번한 여성혐오적 발언, 사생활 침해에 기반한 질문은 안 그래도 초강한 나의 멘탈을 더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래도 조금씩 변하는 게 느껴지고 있지만 같은 창업자라도 남성은 피해갈 수 있는 불편함과 부당함에 여성은 상대적으로 훨씬 많이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농촌에서 만난 여성 창업가들은 나에게 더욱 소중하다.
1~3편까지 사회적경제와 사회적기업에 대해 사실 비판적이고 어둡고 힘든 일만 얘기했지만 이제서야 고백하건대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더럽고 찌든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의 의인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이 일을 하고 있구나 - 라는 걸 문득 깨닫게 된다.
누군가가 내게 행복한가 묻고 '예/아니오'로만 답하라 한다면 기꺼이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게 있어 '행복'의 기준은 까다롭지만 매우 작고 사소하기 때문이고 하루하루 일상 속에서 그 행복들을 몇번이고 마주하기 때문이다. 돈 10억을 버는 게 행복인 사람에게 나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역으로 돈 10억이 내게 거저 주어진다고 해서 행복할 것인지에 대해 나는 먼저의 질문에서 처럼 쉽게 '예'라고 답하지 못할 것이다.
창업을 하고 하루에 1번 이상 꼭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
나는 왜 사회적기업을 하고 있을까
나는 왜 술펀을 창업했나
여전히 답을 찾는 과정이긴 하지만 조금씩 정치, 사회, 경제, 제도에서 주는 답이 아닌 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가고 있는 것 같다.
2017년 사회적기업가육성사업이 년초부터 공개되었다.
더 스마트하고, 더 똑똑한 사람들이 올해도 이 바닥에 더 많이 유입되어 희망없는 이 시대 촛불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술펀을 두드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