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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함존중 Feb 15. 2019

미국에서 받은 문화 충격 下

함께 잘 살아가는 길을 지키기 위하여


https://brunch.co.kr/@ssoojeenlee/71



2. 로버트 몬다비에서


나파밸리에서는 그 유명한 로버트몬다비를 거를 수 없지.


준비를 워낙 하지 못하고 간 탓에 라스베가스에서 샌프란시스코 오는 버스 안에서 대략적인 루트와 정보를 검색할 예정이었으나 생각보다 버스가 불편해서 밤새 정신없이 잠만 잔 것 같다. 일단 렌트를 했으니 가고 보자.


로버트몬다비 입구


나파밸리 도착해서 첫날은 소노마 지나가며 가장 크게 보이는 Domaine Carneros에 들어갔고 거기서 물어물어 Artesa 등 몇 군데를 더 방문했다. 첫날 저녁 숙소에 도착해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로버트 몬다비에 여러 마리아주 프로그램이 있어 아침에 일어나 오피스 아워가 되자 마자 문의를 했다. 겨울은 역시 비성수기인지 운영하지 않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120불까지 런치 프로그램은 이미 정원이 다 찼다고 한다. 오늘 바로 가능한 음식 매칭 프로그램은 없냐고 물어보니 Exclusive Food&Wine Tasting Experience가 가능하다고 한다.


https://www.robertmondaviwinery.com/Exclusive-Cellar-Tasting


빗길을 뚫고 도착하니 우리의 투어가이드는 Eric이라는 유머를 갖춘 중년 신사남이다. 언제나 그랬듯 첫 질문은, "당신은 소믈리에입니까?"


나파밸리에서 놀라웠던 점 중에 하나는 대부분의 와이너리 가이드들이 단순 직원이었고 모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에릭은 나파밸리 투어 중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소믈리에였다. 로버트 몬다비처럼 규모가 크고 직원이 많으며 이렇게 음식매칭 프로그램을 중점적으로 하는 사람은 소믈리에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필드형 전문가로나 할까?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지 않았다고 그 사람들이 비전문적이거나 부족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일하는 곳, 와인에 대한 자부심,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외부에서 발급해주는 자격증이 아니라 스스로 학습하고 탐구하는 사람이 '진짜'라고 믿는 나로서는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와이너리 투어의 시작은 로버트 몬다비의 역사와 창업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상기 홈페이지 뿐만 아니라 구글만 뒤져도 역사가 있으니 직접 살펴보시고,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다음부터.


1966년 처음 로버트 몬다비가 나파밸리에 정착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나파밸리로 몰려들었고 와이너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로버트 몬다비는 아낌없이 자신의 노하우를 나누고 주변의 소규모 신생 와이너리의 와인 생산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리고 말했다. 


내 이웃이 잘 되는 길이 내가 잘 되는 길이고 나파밸리 전체가 함께 잘 되는 길이다.



로버트 몬다비가 시그니처가 된 것은 그 유명세와 와인 맛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 그때 사실 쫌 눈물 날 뻔 했다. (눙물 쫌 딱꼬...)


내가 그토록 외쳐온 가치, 


내 옆 사람을 도와주는 게 나를 돕는 길이고 우리 전부가 잘 되는 길이다.
= 내 옆에 양조장이 잘 되야 나도 잘 되고 마을 전체가 잘 되는 길이다.
=지금은 파이를 쪼갤 때가 아니라 키울 때다.


이 쉬운 말이 한국에서 내내 무시당하다 생면부지의 나라에 와서 이 말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을, 양조장을, 마을을 만났을 때 나는 먼저 원망을 해야 할까, 분노를 해야 할까, 혹은 기뻐해야 할까?


내게 나파밸리의 추억과 감동은 풍광과 규모를 넘어 그 정신 때문에 비로서 오래 각인될 것이다.



3. 뉴욕에서


뉴욕에 도착한 첫날 공항에 내리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AT뉴욕지사였다. 그뤠잇넥(Great Neck)에서 맨해튼(Manhatton)으로 옮긴 걸 모르고 갔다가 조금 쑈한 건 안 비밀. 이 자리를 빌어 AT 한국본사 식품진흥부 및 뉴욕지사 관계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 말씀 올립니다 ㅎ


탕스리쿼(Tang's Liqour)에 무작정 전화하고 대책없이 찾아 가서 탕 사장님을 만났다. 회색빛의 창고 안에 30년 동안 뉴욕에서 한국 술을 유통시켜 온 백발의 노인과 한국인 너댓 명이 사무실에서 미팅룸이랄 것도 따로 없이 한켠에 마련된 소파에서 어떤 연유로 미국에 정착한 내 윗 세대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 역시 알콜 드링크에 관련된 여러가지 제도와 규제에 대해 가감없이 질문하였다.


미국에서 내가 만난 첫번째 충격이었다. 어떤 도매상에서 하나의 술을 취급하면 다른 도매상에서는 그 술을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브랜드의 술을 선점하면 후발주자는 그것을 팔 수 없다는 것. 왜냐고 물었더니 "선발주자가 힘들게 닦아 놓은 시장을 훔치는 게 아니냐"는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다. 법과 제도가 이러하다면 여긴 신자유주의를 해도 된다. 백번해라. 인간은 어차피 이기적이다. 법과 제도가 이렇게 인간의 자유를 규제해도 누군가는 뒷통수를 칠 것이고, 법을 어길 것이다. 그렇지만 법과 제도가 미비하다면 그곳은 생지옥일진대, 그것이 바로 한국 시장이다. 한국 시장은 먼저 법을 어기고 이득을 취하는 게 훗날 벌금을 내고 법을 지키는 것 보다 훨씬 이익이다. 그래서 자본이 많은 이들은 자주 법을 어긴다.


좋은 아이디어는 기업이든 정부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베껴가는 게 한국이란 나라 아닌가. 심지어 공익광고에서도 저작권 버젓이 살아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도용하는 나라다. 청년이 패기하나로 피땀흘려 일궈놓은 비즈니스를 세금으로 치하하진 못할 망정, 자기 말 잘 들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걍 줘버리는 곳이다. 좋은 아이디어 실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력과 상관없이 교수의 권위, 전관예우, 허울 좋은 직함에 기대는 나라다. 아무리 정부가 바뀌어도 적폐는 보수-진보, 우파-좌파 할 것 없이 종류만 다를 뿐 양은 같은 듯 하다.


다만 지천명의 원리로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상대의 이해관계, 하늘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 일치시키고 받아들일 뿐이다. 공자는 하늘의 뜻을 성선설에 따라 해석했겠지만, 스무살 때부터 우주의 욕망을 취미로 공부해 온 내 입장에서 하늘의 선악은 인간이 부여한 개념에 불과하며, 다만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개인성에 따라 상대적 크기가 달리 느껴질 뿐이다. 아, 인간들은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더라. 인간들이 부르짖는, 혹은 찾아 헤매는 '기회'란 결국 시대의 운명이다.



미국에서 받은 문화충격이란 결국 '지금' 내게 이러한 시간들이 주어졌기 때문일 거란 결론이다. 원래도 '후회없는 인생을 살자'가 인생 모토고 브런치 소개글 조차 '나로 태어나 나로 살았고 후회는 없다'인 인간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인간인지라 삶의 주요한 순간, 내가 택할 수 있었던 작고 얇은 가정(What if)들에 대해 가끔은 상상해 보았었다. 그리고 3주간의 미국행을 계기로 이제는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단 한번의 선택이 비틀어 졌더라도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없었을 것이 분명하기에. 참 재밌게도 미국에서 내 첫 선택지의 비틀어진 시간의 길목에 있던 친구네 집에서 참 오래 잘 쉬었다. 그 친구가 미국에 간 이후로 십수년이 지나서야 다시 처음 만났지만 이십년의 세월이 우리에게 준 시간을 만나지 못한 동안 어떻게 견디어 왔는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때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 비단 둘뿐이겠는가? 그러나 결국 남은 것은 우리 둘인 것이다. 


선택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젠가 내가 지금보다 확실히 더 성공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더더더 드라마틱할 테니까. 그리고 과거의 망령을 소환하기에 아직 나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너무 바빠서 말이지.


아무튼 나는 향후 3년간 불빠에서 미국빠로 변할 것 같음 -_-;;;

한빠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은 역시 내겐 애증의 대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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