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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함존중 Feb 15. 2019

미국에서 받은 문화 충격 上

약자를 먼저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하여

오늘의 이야기는 <미국에서 받은 문화 충격 1편>


- 이라 쓰고 위안이라 읽는다. 왜냐하면 내가 지난 여러 해 동안 여러 번 외쳐오던 말들이, 얼마 전에도 링크했던 전문지에 기고한 글들이 사실은 모두 하나의 맥락인데 한국에서 허공 속 외침이라 느꼈던 나의 목소리에 대한 응답을 지구 반대편에서 듣고 왔기 때문이다.


1. 버스정류장에서


라스베가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넘어오기 전에 버스 탈 시간이 꽤 남아서 거리 구경에 나섰다. 카지노도 가고. 65불 쓰고 15불 정도 딴 듯. 아 정말 일확천금도, 도박도 나랑 안 맞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허구헌날 주창하는 사람인 만큼 남의 돈 거저 먹는 것도 취향은 아니다.  


아무튼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갈 시간이 다가와서 호텔에 짐 찾으러 들어가려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미국인 단체관광객(혹은 대가족 관광)으로 사료되는 열명 남짓의 사람들이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했는데 아무도 타질 않아(라스베가스 스트립엔 한 정류장에 한 노선의 버스만 선다. 즉 다른 버스를 탈 리가 없단 얘기) 내가 먼저 타려고 휘리릭 가로질러 발을 버스 앞문 계단에 올리려 하는 찰나, 버스 안에 있던 가드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못 타게 한다. 아래를 가리키길래 쳐다보니 버스 발판 아래에서 뭔가가 천천히 지이익 거리며 나오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자동으로 동작하는 철로 만든 간이용 판 같은 것이 인도를 향하여 나오고 있었다.


알고 보니 휠체어를 탄 사람이 내릴 수 있도록 버스와 인도의 높낮이 및 빈공간을 메울 수 있도록 연결하는 장치였다(특별한 이름이 있나요?). 전술한 것처럼 바로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매우 느려 정류장의 모든 사람들이 짧지 않은 시간을 내내 기다려야 했지만 아무도 불평하거나 투덜대지 않았고 매우 당연한 것처럼 휠체어가 안전하게 내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걔 중엔 가드 및 휠체어 탄 분의 보호자와 함께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고.


나는 버스에 이런 장치가 있다는 것, 타는 사람이 아니라 내릴 사람, 즉 약자가 먼저라는 것(한국에선 보통 하차 시 뒷문으로 내리는데 이 때는 일반 승객들이 뒷문으로 내리는 동안 휠체어는 앞문으로 내리더라), 운전사와 가드는 물론이고 버스를 기다리던 승객들 중 단 한명도 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떤 부정적인 표현이나 제스쳐를 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마음이었다.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뭣 모르고 버스를 타려 했던 내가 부끄럽진 않았으나 왜 이 당연한 상황을 두고 이토록 감동과 충격을 받아야 하는지가 부끄러웠다.



한국에서 우리는 왜 이토록 당연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가?



예전에 술펀의 첫 사무실이 아파트촌이 한 가득이던 목동 한 복판에 있을 때 당시 직원 2명과 밥을 먹고 돌아오다 길거리에서 버스정류장을 찾는 눈 먼 남성 장애인을 마주친 적이 있다. 썬글라스를 쓰지 않은 채 눈이 반쯤 감긴 20대 초반 남짓 되어 보이는 맹인 남자가 보호자도 없이 허공에 팔을 허우적대며 무언가를, 혹은 어딘가를 찾고 있었다. 20m 남짓을 걸어오는 동안 지켜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우리 회사가 사회적기업(예비이긴 했지만)이라 같이 일하고 싶다던 나머지 직원 둘도 아무 것도 못 본 양, 지나쳐 걸어가는 것이다.


나는 뒤돌아서 무엇을 혹은 누구를 찾는지 묻고 양해를 구한 후, 버스정류장을 찾는다는 지팡이조차 없이 헤매이던 맹인의 팔꿈치 위쪽을 조심스레 잡고 걸어서(지팡이가 있으면 지팡이를 잡고 걸어주면 된다) 300m 정도 떨어진, 술펀 사무실이 있던 해누리타운 빌딩 바로 맞은 편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함께 있던 직원들과 함께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가는 동안 살펴보니 여성이었던 두 명의 직원은 다소 불편해 하고 확실히 불안해 하는 감정이 역력했다. 버스정류장에 무사히 도착한 후 타기를 원하는 버스가 올때까지 기다려 줄 요량이었다.


여기서 끝나면 그래도 조금은 훈훈한 미담이겠지?


남성맹인은 원하는 버스가 있는 곳까지 내려다 준 나에게 짜증을 냈다. 확실히 분노나 화는 아니었고 불평과 투덜거림에 가까웠다. 우리가 그 맹인을 만난 곳은 정확히 두 곳의 버스 정류장 중간 어디메쯤이었는데 해당 맹인의 입장에선 거리가 단축되고 내 입장에선 사무실이 가까운 버스의 진행방향으로 걸어 그를 데려다 준 곳이다. 그런데 자긴 항상 위쪽의 정류장을 이용했는데 여길 왔다고 징징댔다. 그는 끝내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야 워낙 장애인이나 정신적 신체적으로 불편하고 아픈 사람들을 많이 겪어봐서 익숙하고 씁쓸한 게 다였지만 안온하지 못한 상태로 모험에 동참한 다른 직원들이 같은 상황을 겪게 될 때 나처럼 선뜻 나설 수 있을까?


가득찬 불신의 사회, 한국. 당연한 것을 누릴 수 없는 사회다. 어려움에 처한 약자를 도와주는 것, 조금의 시간을 주변을 돌아보는 데 쓰는 것, 서로 고맙다, 조심해서 다니라며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인사를 웃으며 하는 것.


5년 만에 고백하건대, 나는 그때 한국에서 '사회적기업'을 한다는 것에 대해 첫번째로 의문을 품었다. 의문을 회의로 고쳐쓸 수도 있고. 위의 단락과 본 단락 사이에 많은 문장이 생략되었겠지만 누군가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어렴풋이라도 짐작해 보길. 사회적이지 않은 사회이기 때문에 굳이 '사회적경제'라는 말이 특이한 아이덴티티가 되는 사회라는 것이 작년에 내가 인증을 받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내린 결론 중 하나다.



- 2편에 계속


https://brunch.co.kr/@ssoojeenlee/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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