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더로 세상을 봤을 때 느꼈던 그 이끌림, 진짜 '알 수 없는' 이끌림
| 생후 342개월 |
애송이군요?
따: 요즘 어떻게 사나요?
리: 엄청 바쁘다가 이제 좀 정리가 돼서 약간 끝이 보인다. 여유가 보인다.
근데 넘 늦게 정리된 거 같다. 원래 12월에 일이 끝나야 연말 분위기를 만끽하는데... 엊그저께 문득 달력 봤는데 올해가 보름 남은 거야. 그래서 너무 급하게 연말 분위기 내고 있어. 근데 잘 안돼. 아쉽습니다. 근래 너무 바빴다.
따: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리: 저는 촬영감독입니다. 하지만 돈만 주면 편집도 하고 조명도 치고 사운드도 하고 다 합니다. 송다예 비스무리한 사람입니다. (저는 리인규 선생님의 작업실 뒷 책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따: 어쩌다 그 일을 하게 됐어?
리: 어… 이게 어려운데. 어렸을 때, 고등학교 때도 사진 찍고 포토샵으로 보정하고 그런 거 되게 좋아했어. 사진 찍는 거, 카메라를 되게 좋아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변변찮은 생활(?)을 하다가 진짜 오랜만에 카메라를 다시 잡았는데, 너무 좋은 거야.
아, 이거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어떤 강력한 끌림이 있었어. 진짜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 다큐, 영화 이런 장르는 아니었고, 그냥 금손이 되고 싶다,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21살, 22살 때 확 들었거든. 그 뒤로는 홀린 듯 영상작업을 했던 거 같아.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진 않았어. 말한 것처럼, 그냥 어렸을 때 부터 갖고 있던 취미 중에 하나였는데, 갑자기 폭발해버렸지.
따: 그땐 왜 다시 카메라를 들게 됐어?
리: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캐논 70D를 샀는데, 학교에서 포스터 만들거나 연극 올리면 배우 프로필 들어가잖아. 그거 내가 다 찍고 그랬거든. 그땐 그냥 취미로. 근데 저희 어머니 남자친구께서 사진을 되게 좋아하는 학교 과학 선생님이거든요. 왜, 학교에 꼭 그런 선생님 한 명씩 있잖아? 막 사진 찍는 거 좋아하시는. 그 분이 나한테 렌즈를 사준 거야. 24-70. 좋은 렌즈를 선물을 받았으니 끼워서 찍었어.
원래 카메라를 평소에 들고 다니진 않았는데, 아예 옆구리 차고 다닌 게 그때부터야. 사진 찍는 게 너무 재밌었어. 그때 내가 극장에서 무대 스텝 알바를 했었는데, 극장에 막 빨간 객석 사진 이런 거 찍고. 아무튼 사진을 막 찍었어. 그 옛날에 찍었던 사진들이 남아있는데 보내줄게.
리: 그때 진짜 많이 찍었어 사진을. 당시에 감성사진 그런 게 유행이었는데ㅋㅋㅋㅋ 2014년, 2015년 즈음? 아무튼 그런 게 유행이기도 하고, 아직까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게 악세사리였단 말이야.
사실은 '그런 내'가 멋있었다. 사진 찍는 내 자신이 너무 멋있었다. 그런 느낌도 있었어. 기타 괜히 메고 다니는 선배들 있잖아? 그런 것처럼 '카메라를 든 나'가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24-70렌즈가 장착되어있다는 건 so special... 엄마 남친 감사 드립니다. 잘 지내시죠?
리: 흠.. 그때 그때 조금씩 다른데, 요즘에는 그 순간이 되게 좋은 거 같아. 촬영할 때 촬영장에서 분위기 좋게 +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무리없이 사고없이 잘 끝나고 나면 우리끼리 분위기가 좋잖아. '오늘 촬영 좋았다-' 서로 얘기는 안 하지만, 그냥 기분이 다들 좋은 게 보이잖아. 그 순간.
따: 정말? 그림 잘 나왔을 때가 아니고?
리: 얼마 전 까지만해도 그랬지.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앵간치 촬영은 하는 거 같아. 내가 그냥 막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쒯구리(shit구리)게 찍는 걸 걱정할 경우는 드물고, 어떻게 하면 예쁘게 찍는지도 알겠고. 이제 예쁘게 찍는 건 디폴트라서. '촬영 현장이 얼마나 화기애애하고 구성원들이 얼마나 기분좋게 촬영을 했느냐'가 좋다고 요즘은 느껴.
따: 그럼 촬감하면서 좌절하거나 회의감 느낄 때도 있어?
리: 넘 많은데? 걍 내가 너무 못났다고 생각들 때. 내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할 때. 평소에는 스스로를... 내가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살잖아. 나는 더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실제로 그렇게 못하는 거지. 능력이 달려서일 때도 있고, 아니면 덜 부지런했을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닌 거를 느끼는 순간.
예를 들면, 마감을 자꾸 미루는 거지. 그건 단순히 게으름 때문일 때도 있지만, 사실 '내가 이걸 잘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손을 못 대고 있는 경우가 있잖아. 그러면 '내가 아직 그 정도 인간은 못 되는구나' 느낄 때 비참하지.
근데 옛날 같았으면 '아, 나 왜케 부족하지', '능력이 없지' 할텐데... 이제 그런 건 아니고, 받아들이는 거 같아. 나는 지금은 이만큼이구나. 나를 알게 되고. 그렇게 나를 받아들일 때 슬퍼지는 거 같아. 내가 누군지 알겠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인정하게 되는 순간에 슬퍼.
따: 뼈 아프지.
리: 응, 뼈 아프지.
따: 언제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 거 같아?
리: 그것도 요즘인 거 같아. 이번 1년 동안.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답답할 때, '왜 이럴까' 생각해보잖아? '내가 어떤 문제가 있나'를 곱씹어보는데. 내가 부족하구나 싶었지.
올해 유독 내가 열정적으로 시작했다가 끝날 때 되면 짜게 식는 경우가 있었고. 물론 상황이 안 받쳐주고 그런 것도 있지만, 자꾸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내가 대단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나 싶기도 했고. 나이브하달까. 시작할 땐 일단 가볍게 생각하는데, 작업을 하다보면 뭔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거든. 근데, 요즘엔 그만큼 부지런하고 집요하게 그 일들을 수행하진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 게을렀다 싶지. 그리고 나중에 가서 후회하고.
따: 그럼 게으른 너를 받아들인 거야? 네 성격이면 어떻게든 깨려고 들 것 같은데?
리: 옛날엔 그래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시도라도 해봤거든. 근데 이제는 그렇게 안 하고, 어떻게 하면 어느 정도 예쁘게 만들어낼지는 알아버렸으니까. 도가 튼 느낌이야.
따: 그건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된 게 아닐까? 진짜 고연차들은 막 매번 처음하는 것처럼 불태우진 않잖아.
리: 하긴, 그것도 맞긴 한 거 같아. 그래도, 여전히, 마음을 쓰는 만큼 부지런해야 한다고 생각해. 예를 들면, 로케이션 정해지면 꼭 챙겨서 가본다거나. 촬영 전에 카메라 테스트를 해본다거나. 조금 더 리서치를 해본다거나. 이미지, 분위기, 룩(look)에 대해 리서치하고 고민하고. 이런 것들. 연출, PD들이 프리단계에서 사전 인터뷰하는 것처럼 촬감도 그런 걸 프리 단에서 같이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게 맞거든. 요즘은 하던대로 촬영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 말하다 보니 부끄럽네요.
따: 그래도 내가 너 어떻게 일하는지 다 보는데. 뭔가 놓치게끔 일한다는 생각은 안 들거든? 그래서 난 네가 그렇게 일하는 게 프로 직업인 같아.
따: 너 맨날 네가 운이 좋다고 하잖아. 그건 무슨 뜻이야?
리: 너도 내가 한 두 발 먼저 가있다고 생각하잖아. 조금 더 경험 많고 더 많이 일해보고. 뭔가 아는 거 같다고 생각한다고 했잖아. 그거야.
따: 일을 일찍 시작해서 그런 걸까? (*23살에 촬감 시작)
리: 그런 것도 있고.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사실 닷페도 운이 줗아서 만난 거니까.
따: 왜 유독 너에게 운이 왜 따를까?
리: 운이 한번 따랐기 때문에 아닐까? 닷페의 영향이 크지. 그게 날 바꿨고. 그래서 운을 달고 다니게된 거 아닐까? 첫단추 잘 낀 거지. 좋은 사람들 만나고. 아니면 나도 모르게, 내가 더 마음이 가고 편한 쪽으로 쫓아가다보니 이렇게 된 걸 수도 있고. 내가 항상 느끼는 게 '나는 인복이 많고 잘 풀린다'는 거거든. 근데 어떻게 사람이 항상 잘 풀려? 그럼 나는 운이 좋은 게 맞는 거지.
리: 사실 아직도 알수 없는 이끌림에 끌려다니긴 하거든. 20대 초반에 느꼈던, 뷰파인더로 세상을 봤을 때 느꼈던 그 이끌림. 진짜 알수 없는 이끌림. 그 매력이.. 나한테는 엄청 깊고 심오한 세계같은 느낌인데, 거기에 난 여전히 빠져있긴 해.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엄청 예쁜, 엄청 멋지고 아름답고 완벽한 이미지를 찍는 상상을 한다? 딱 어떤 장면이라기 보단 그냥 느낌만 있는 건데… 촬영하다 보면 그럴 때 있잖아? 예기치못한 순간에 갑자기 빛이 타이밍 좋게 온다거나, 좋은 걸 찍게 된다거나. 그런, 우연찮게 생기는 아름다운 순간. 그런 순간들을 꿈꾸는? 그런 거 같아.
심지어 어떤 사명같기도 해ㅋㅋㅋㅋ 천직이라고 하잖아. 이건 내가 느끼기에는 '하늘이 나에게 촬영을 하라고 시켰다' 그런 정도의 끌림이에요. 계시 같은 거야.
(급겸손)근데 요즘은 열심히는 안한다. 물리적으로 바쁜 건 맞지만... 왜 그럴까? 옛날 같으면 인스타에 길가다 좋은 장면 있으면 스케치도 찍고 이랬는데. 요즘은 일할 때 말고는 카메라를 안 들어. 왜 그럴까. 나 이제 카메라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래도 닷페 다닐때만 해도 렌즈 사면 버스타고 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찍어봤는데, 왜 지금은 안 할까?
따: ...;; 너만큼 카메라 사랑하는 사람을 난 본 적이 없다..ㅎ
리: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냥 음악 듣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 옷 같은 거 찾아봐. 영감이 될 만한 걸 보는 건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나? 그런 거 좀 디깅해보고... 말곤 없는데? 영감이 되는 문화생활? 컬쳐라이프? 향유합니다. 음악 듣는건 진짜 좋아하는 거 같아. 거의 일처럼 하는 거 같아.
따: 음악 듣는 건 언제부터 좋아했어?
리: 나는 하나 빠진 노래 있으면 한 곡 반복으로 계속 듣고 그러거든? 좋은 노래 찾으면 득템한 느낌이어가지고. 디깅은 그 득템을 계속 하려고 하는 거 같아. 일주일치의 행복을 찾아야 또 일주일 행복하니까.
따: 하긴, 한 곡 반복도 일주일이 최대지.
리: 그 이상은 어렵지.
따: 옷이든 음악이든 디깅하는 거 자체를 좋아하는데, 왜케 좋아해? 찾는 그 과정 자체? 아니면 그렇게 좋은 걸 아는 나?
리: 찾아낸 결과물이 좋은 거지. 최근에 내가 너 알려준 노래도 좋잖아? (좋지) 그렇게 일주일치 음악 얻는 거야. 이런 옷들도 (인터뷰한다고 차려 입고 온 옷의 팔을 벌린다) 10년 동안 입잖아. 겟 했을 때 좋잖아. 좋은 걸 수집하고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아.
따: 최애 브랜드 있어?
리: 최애브랜드요...? 그...
...ARRI라는 브랜드가 있는데요.
(일동 빵 터짐)
리: 촬영감독들한테는 에르메스 가방 같은. 그런 카메라 브랜드입니다. 아리. A.R.R.I. 그리고 나는 대체로, 브랜드의 히스토리나 헤리티지가 있는 브랜드 있잖아. 브랜드의 방향이라기보단,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진정성에 마음이 가.
따: ARRI의 진정성은 뭔데?
리: 근본 중의 근본. 아리는 가장 먼저 필름 카메라를 양산해낸 그런 브랜드거든. 5-60대 헐리웃 시절부터 필름을 생산했는데, 디지털로 전환되면서도 망하지 않고 여전히, 굳건히, 넘사벽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멋진 브랜드지.
따: 살면서 가장 깊게 덕질한 건 뭐야?
리: 카메라가 그나마..? 사실 그런 유일무이한 분야는 없어. 하나만 집요하게 파진 않아. 그래도 넓게 가는 편이라, 그때 그때 좋아하는 거 있으면 파고 빠지고. 그래도 한번 빠진 분야는 꾸준히 오랫동안 가지고 가는 거 같아.
소리(사운드)도 많이 팠고. 스피커. 헤드폰. 좋은 소리에 대한 갈망 같은 게 있거든. 동시 녹음 수업도 들었어. 좋은 소리를 만들고 싶어서. 이게 약간... 이미지도 그렇고 사운드도 그렇고, 한번 한 계단 올라가면 돌아갈 수가 없어. 갯벌 같은 거야. 늪. 빠져나올 수 없음. 나를 내 통장을 좀 먹음.
리: 성장서사잖아, 10대가 주인공이면. 거기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있지 않나?
그리고 청춘물, 학원, 소년만화가 장르적으로도 내 취향인 것도 맞다. 대체로 다 따뜻한 거 같기도 하고. 그래, 따뜻한 이야기. 감동이 있거나. 약간 찡한 포인트가 있거나. 캐릭터를 따뜻하게 그리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 다크하고 디스토피아고 이런 거 말고. 결말은 어쨌든 훈훈해야한다.
따: 장르적으로는 어떤 면이 좋은 거야?
리: 예를 들어, '학교'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스테레오 이미지. 그 감성! 소위 '일본 감성'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를 좋아해. 요즘 레트로도 유행이잖아? 유행인 이유를 다들 느낄 거 아냐? 그렇게 이미지로 확장시키면, 그림의 느낌도 재밌고 좋아.
키워드로 얘기하자면, 시티팝이나 레트로, 그런 걸로 이야기되는 장면들이 좋나봐. 그냥 남들 흔히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거죠. 다들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거지, 뭐.
따: 네가 저번에 이런 날것의 느낌 좋다고 보여준 일진(?)사진 있잖아. 사실 일반적으로 인식이 좋지 않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피해자이기도 해서 다루기 쉽지 않은 것 같은데. 넌 그런 걸 좋아하고, 그들 각각의 사정과, 그 고유한 감성을 이해하고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뭐가 좋은 거야?
리: 맞아. 그런 게 있어, 나한테. 뭐냐면 약간.. 되게 원초적인 느낌? 몰라, '일진'이라고 퉁쳐지는 사람들도 다양한 유형이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진'이라고 하면, 지방의 일진. 서울 일진 아니고? 그들 특유의 원초적이고, 사회성 결여되어있고, 러프하거나 거칠고. 그런 원초적인 것에서 나오는 행동이나 성격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집니다.
예를 들면, 애기가 지나가다가 꽃이 예쁘다고 꺾어버려. 근데 그 아이는 그게 너무 머리가 새하얀 나머지 그냥 예쁘다고 꺾어버린 거잖아. 물론 지금은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 안 할 거지만. 그렇게 막 나가는 시절이 아름답다고 포장돼서 남아있는 게 있는 거 같아. 미화된 장면들. 누구나 한때는 그럴 수 있는 동물적인 인간이었으니까. 막 나가던 시절의 노스텔지어..?
따: 선생님도 막 나가셨나요ㅋㅋㅋㅋ?
리: ㅋㅋㅋㅋ사람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무지하고 빻았고, 꼴리는대로 하던 시절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무지했던 그때만 있는 거기도 하고. 그런 게 왜 아름답다고 느껴지는지는 잘 모르겠네.
아무튼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 예를 들어 영화 <프란시스 하>도 나한텐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아. 쪼오끔 반사회적이고 몰상식하게 보이고, 그런 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게 있잖아. 그런 거?
리: 기대가 됩니다. 매번 말했지만 기대돼요. 이제 시작이다. 지금까지는 뭔가 그냥 이렇게 이것 저것 시도해보면서 다치기도 하고, 조금의 성과들도 느껴보고 했다면, 이제 쪼끔은 알 거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지금까지 되게 어린애 취급 받았는데, 서른부터는 그러진 않을 거 아냐.
따: 사회인 대열에 합류하는 건가? 그걸 설레하는 게 애 같은데?
리: 엌ㅋㅋㅋㅋㅋㅋ 맞아. 그럼 사실 큰 의미는 없을지도? 그냥 딱, 초등학교 6에서 중1 넘어갈 때 느낌. 이제와 돌아보면 퉁쳐서 '어린 시절'일 뿐인데, 그 당시에는 엄청 크는 거 같았잖아. 지금이 그 때의 느낌이겠지? 그리고 20대 내내 갖고 살던 고질적인 불안감, '내가 뭔지 모르겠다'는 게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야.
따: 너의 20대는 어떻게 흘러갔길래?
리: 한 마디로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사실. 이게 자칫 '겁나 열심히 살았다'처럼 들릴 수 있는데,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렸다. 난 진짜 그렇게 산 거 같아.
따: 맞아. '앞만 보고' 인데, 그 앞이 멀리 내다본 앞도 아니고
리: 맞아
따: 한치 앞만 보고 살았다... 그래서 넌 좋았어?
리: 후회는 안 하는 거 같아. 어렸을 때 나와 어딘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그러라고 얘기해주고 싶어. 이만하면 나 잘됐...? 나 잘 컸잖아요..?
따: ㅇㅈㅇㅈㅋㅋㅋㅋ 20대 초반에 넌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어?
리: 그래도 나는 좀 똑부러지고, 그런 사람? 리더처럼 굴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거든. 사람들 모여있으면 진행을 하려고 한다거나 그런 게 있었어. 해결사. 똑부러지게 해답을 내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나봐.
따: 오, 정말? 요즘은 그래보이진 않는데.
리: 내가 어렸을 때 나보다 훨씬 나이많은 형들이랑 어울렸거든. 그 형들을 동경한 거지. '어른'. 내가 그 사람들을 따르고 싶었으니까. 그 형들한테 영향을 엄청 많이 받았단 말야. 그래서 내가 약간 애늙은이 같은 느낌이 있었어. 되게 사람 느긋하고, 다른 애들 다 긴장해서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나혼자 느긋하고, '나는 뭘 좀 안다'. 이런 느낌으로 있고ㅋㅋㅋㅋ
티내고 떵떵거리진 않았지만, 그게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서 긴장 안 하고. 그러니까 실제로 주변의 친구들도 나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던 친구들 되게 많았어.
따: 요즘도 그래?
리: ㅋㅋㅋㅋ근데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이 상향평준화 돼. 이제 내 주변의 친구들이 다 너무 어른스럽네? 너무 배울점이 많고. 내가 고등학교때 11살 차이 나는 형들을 만났거든. 근데 지금 내가 그 때 그 형 나이가 됐어. 그래서 더 이상 애늙은이 같긴 글렀지.
리: 지금 생각해보면 10대 때 허세 좀 부렸던 것 같아요. 멋 부리기 좋아하고, 까불고, 강약약강은 적당히 따르되 누구에게도 모나진 않은? 잘 웃고. 적당히 분위기 맞춰서 까불거리는 애 반에 한명씩 있잖아. 걔가 나야.
아, 그때도 애늙은이 느낌이 있었어. 말 많이 안 하고. 약간 관조하듯이 보는 애. 멀리서 그냥 흐뭇하게 쳐다보는 애. 약간... 랩퍼 김하온 같은 느낌. 랩 안하는 김하온ㅋㅋㅋㅋ 고등학교 때까진. 좀... '멋짐'에 빠져있었지. 왜, 사람이 멋있는 거 있잖아? 자부심도 있었어. '나는 진국이고 진또배기다.' 그런 우월감에 젖어있었지. '너네는 아직 본질을 몰라'.
아, 유현기라는 친구가 있는데요, 걔랑 둘이 뒤에서 팔짱끼고 그러고 무게 잡고 앉아있었습니다. 다들 츄리닝 입고 있을 때 우리 둘 다 정장 입고 앉아서, "우리눈~ 쥔짜 멋있는 남자들이고~, 세상 다 살았고~ 인생 2회차고~", 요러면서 있었습니다.
따: ㅋㅋㅋㅋㅋ그때의 널 지금 생각하면 어때?
리: 귀여워. 자칫 도가 지나치면 별로였을 수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적당히 젠틀맨 컴플렉스 탑재한 10대?
따: 그때 넌 왜 그랬던 거 같아?
리: 딱 얘기하긴 어렵지만, 누구나 우상이나 동경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당대의 힙스터들 타고 올라가다 보면 우리 중학교 때는 류승범이나, 배정남 같은 패셔니스타들이 있거든. 아니면 타이거JK. 그러니까 그 당시 유행했던 마초 파리지앵 느낌의 사람들을 내가 엄청 좋아했던 것 같아. 그땐 워낙 대세였으니까.
고등학교 때는 GQ를 고등학교 내내 정기구독해서 봤는데, 그 GQ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기조. 젠틀맨 기조. 이름도 Gentleman Quater잖아? 신사 잡지인 거야, 한국어로 치면. 그런 신사적인 거에 대한 동경이었지. 흠뻑 빠져있었고.
따: 그런 게 멋있어 보였구나.
리: 그치 좀 심취해 있었지. 매너 그런거.
따: 20대 때는?
리: 20대에는 '잘 노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거 같아.
따: 젠틀맨->인싸는 갭이 큰 데? 왜 바뀌었어?
리: 바뀐 게 아니야. 클럽같은 데 가면 돋보이는 사람이 있단 말야. 범상치 않고. 그런 사람 동경하고. 인싸? 요즘 말로 하면 인싸들. 멋있는 인싸. 근데 아우라, 돋보임. 카리스마. 근데 그런 게 있으려면 젠틀맨 정신이 기본 탑재가 돼있어야 하거든.
따: 20대 때 너에게 가장 큰 결핍은 뭐였던 거 같아?
리: 결핍이라고 느끼진 않고... 갈망은 있었어. 어른이나 선배에 대한 갈망. 20대 딱 되면 너무 혼란스럽잖아. 뭐 해야될지 모르겠고. '난 어떻게 될까?' 그런 걱정 다 있잖아. 그래서 좋은 어른에 대한 갈망은 항상 있었던 거 같아. 형들을 엄청 따랐지. 주변에 형들 있으면 엄청 말 잘 듣고, 그랬던 거 같아.
따: 좋은 어른 있어 주변에?
리: 닮고 싶은 사람들을 항상 주변에 두려고 했던 거 같아. 내가... 대전에서 중학교 까지 나오고, 고1 때는 혼자 서울 와서 기숙사에 살았거든? 그러다, 고2 겨울 방학 때 혼자 자취를 했는데, 지금 사는 안암동에 처음 자취방 얻었어.
처음 보는 동네니까 금요일 밤에 동네를 한 바퀴 막 구경을 했어. 밤 마실을 다닌 거지. 그날 약간 비가 부슬부슬 내렸어. 우산 쓸 정도는 아니고 바닥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는데, 주택가에 갑자기 기타 소리가 나는 거야. 놀이터 같은 데도 그런 거 들릴 때 있잖아? 근데 그날 기타 소리는 예사롭지가 않은 거야. 졸라 잘 치는 거야.
그래서 잠깐 멈춰서 멀찌감치서 들었다? 보니까 놀이터 정자에 남자 셋이 앉아있는데, 한 명은 문신, 한명은 빡빡머리였어. 근데 기타를 개 잘치는 거야. 대전엔 그런 사람이 없었단 말야? 서울 길바닥에서 리얼 뮤지션을 만나버린 거지. 그래서 내가 한 10몇 분을 다가가볼까 말까 하다가... 내 몸이 그냥 움직여서 갔어. 그래서 "형님 제가 멀찌감치서 봤는데 너무 잘 치셔서..."했어.
그 때 그 형들이 지금 내 나이였어. 29살.
나 고딩 때니까 그 형들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겠어. 그래서 나도 매주 혼자 그 정자에 가서 기타 연습을 했지. 근데 그 중에 한 명이 집이 근처였던 거야. 그래서 우연히 다시 만났어, 몇 주 있다가. 내가 매주 거기 있으니까.
그 형들 아직도 연락해. 쇼림*도 그 형 덕분에 만났고. 지금 한 형은 애기 낳아서... 암튼 그 때 당시에 11살 차이나는 형들이었으니까 형들도 내가 얼마나 예뻤겠어. 그니까 나 엄청 챙겨주고, 나도 엄청 따르고. 그 형들의 영향을 엄청 많이 받았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어떤 성향 중에 되게 큰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고.
따: 오..?! 예를 들면?
리: 쿨병ㅋㅋㅋㅋ? 쿨한 거. 그 애기 아빠가 엄청 쿨하거든, 사람이. 그래서 나도 그냥 쿨해졌어. 모든 걸 개의치 않아하는 성정? 마음에 두지 않는 성격이라든지. 그리고 그 형이... '오쇼 라즈니쉬'라는 인도 철학자가 있는데, 그 책도 읽어보라고 졸라서 강제로 읽었어. 하루키도 읽고. 락도 그때 처음 듣게 되고. 그때부터 음악도 더 좋아하고. 그런 형들이 있는 게 너무 좋아.
우리 엄마도 그 형들한테 엄청 고마워해. 나 혼자 타지 와서 헛돌 수도 있는데 안정감이 생겼으니까. 친형같은 사람들이야, 나한텐. 그 형들은 어느덧 마흔이 넘고~
따: 넌 서른이 되고~
리: 그래서 내가 손윗사람들 엄청 잘 따라. 그 경험의 영향인진 모르겠지만. 닷페 썸머도 내가 엄청 잘 따랐어. 철님도 마찬가지고. 그런 사람들을 잘 따를 때 나도 마음이 편한 거 같아, 안정감도 생기고.
따: 결핍이라기 보단 갈망이었고, 그걸 잘 찾으며 살았네.
리: 맞아 그때 그때 누군가가 있었지.
따: 네가 사람들한테 워낙 잘 하니까.
리: 맞아, 나 잘해, 어른들한테! 예의 바르고 깍듯하잖아? 근데 웃긴 건... 하나 같이 그 사람들은 날 친구로 생각한다는 거야. 사실 난 아닌데ㅋㅋㅋㅋㅋ 난 친구한테 그렇게 행동 안 해.(보고 계신가요?)
그리고 난 성공하고 싶다는 강한 욕심도 있었고. 뭐라도 될 줄 알았어. 결핍은 딱히 없었는데. 풍족했지. 돈도 있었고. 어린 나이에 일 시작해서 여러가지 했고. 잘 풀렸지, 나 정도면. 재수없나요?
사실 내가 긍정 마인드대가리 꽃밭같은 게 있어서. 부정적인 건 잘 까먹고 기억을 안 해. 상처받고 그런 기억을 금세 잊는 편이라 좋게 남았나봐.
리: 그래도 좀 안정적으로 보이고, 일관적이게 되고. 딱 보면 느껴지게 되는 거 같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구나라고. 스무살 때 너가 날 봤으면 얘 어떤 사람이지 하고 파악하기 어려웠을 거야. 근데 커서 만나니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구나 보였을 거야.
아, 부모랑 닮아간다. 이런 것도 느껴져. 문득문득 3인칭으로 볼 때.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아빠의 우유부단함이라든가, 엄마의 철없는 모습이라든가, 그런 걸 반반씩 고루 갖고 있구나. 아니, 내가 말하다가 대답을 안할 때가 있더라고? 심지어 속으로는 어떤 판단도 하고 다 하는데, 대답을 안 하는 거야. 입장 바꿔 생각해서 상대가 대답 안안 하고 있으면 겁나 속터지잖아? 하... 충청도 중년남성 특. 속터지는 면모가 분명히 저한테 있고. 알고 있습니다. 고치려고 노력 중.왜냐면 어렸을 때는 싫어했던 모습이니까. 그래도 아직까지는 '나는 좀 더 나아야지'라는 생각은 갖고 있어. 더 나이 들면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래도. 노력도 하고.
따: 더 나은 사람이려고 해?
리: 그럼. 그래도 나는 사람도 많이 만났고. 좀 더 배웠고. 어디 가서 모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은 있죠.
따: 20대의 장소를 꼽으라면?
리: 많은데.. 합정으로 하겠습니다. 10년 만난 애인도 그 동네에서 만나서 늘 합정에서 놀았고. 그래서 합정의 변천사를 그때부터 쭉 봐왔어. 합정 메세나폴리스가 고3때 지어졌거든. 얼마 안 됐었어. 그땐 푸르지오도 없었고.
그리고 거기 동네 가게들, 합정역 3번 출구에 이인규 치과가 있는데, 그거 아세요? 그게 지금은 사실 반으로 쪼개진 거랍니다. 2층이 통째로 이인규 치과였는데, 반밖에 안 남은 거예요.
따: ㅋㅋㅋㅋ꿰고 있네. 추억이 많구나?
리: 응. 그 동네 너무 익숙하고. 근데 내가 내발로 찾아가진 않아. 나 어렸을때는 막 할 일 없을떈 괜히 광화문 가고 그랬거든. 종로 3가에서 내려서 인사동 한바퀴 돌고, 광화문 가서 교보문고 한번 들리고.
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식당들 다 없어지는 것도 봤어. 없어질 때마다 땅을 쳤지. 나는 맨날 먹던 것만 먹거든? 그래서 가던 식당이 없어지면 나 먹을 게 없어진단 말이야.
따: ㅋㅋㅋㅋ 없어진 거 몇 개 얘기해줘.
리: 안암동에 <홍해>라는 중국집. 지금까지도 내가 먹어봤던 짬뽕 중에 일품이야. 잊을 수가 없다. 홍해에 '홍'짬뽕이랑 '해'짬뽕이 있었거든? '해'짬뽕에 낙지랑 숙주가 들어갔거든. 근데 어느날 없어진 거야. (탄식)... 그게 체인점도 아니고 찾을 수가 없더라고. 와, 너무 슬펐어.
그리고 합정에 <자소담>이라는 국수집. 여긴 유명한데거든요. 많이들 아실텐데. 거기 국수도 진짜 맛있었는데 초밥집으로 바뀌었습니다ㅠㅠ
그리고22... 까치산에 <홍짬뽕>이라고 있는데요. <홍짜장> 체인점이야. 근데 이게 가맹점이라 맛이 다 달라요. 까치산점이 진짜 맛있는 중국집이었는데 거기도 없어졌습니다.
따: 10,20대 중 돌아가서 바꾸고 싶은 하루가 있을까? 눈 딱 떴을때 그날 아침인 거야. 그래서 작은 뭔가라도 바꿀 수 있는 하루가 있다면?
리: 없는데.. 굳이 고르라면 입시할 때? 연기과 안 갔을 거 같아. 물론 재밌게 다니고 놀았지만. 다시 선택하면 다른 거 했을 거 같긴 해. 미술 아니더라도, 좀 흔한 과 갔을 거 같기도 하고. 앗싸리 영상 배웠을 수도 있고.
따: 맞아. 연기과는 어쩌다 가게 됐어? 간단하게만,
리: 고등학교 때 학생 극단처럼 공연을 돌리는 모임이 있었어. 거기서 나 연기 가르치던 선생님이 대학 교수님이었거든. 나를 보더니, 뭣도 안될 거 같은 애니까 데려가서 키워주신 거지. "너 연기해라" 해서. 나는 "어 진짜욧? 저 연기해도 돼욧?" 해서. 그때는 신나가지고. 그 교수님이 나 진짜 예뻐했어. 너는 진짜 꼭 연기하라고 했지.
따: 그 분은 왜 그러셨을까? 네가 너무 너무 잘했나?
리: 악마가 아니었을까
따: 그럼 10,20대 중 돌아가서 다시 누리고 싶은 하루. 눈 딱 떴을때 그날 아침인 거야. 그래서 다시 즐길 수 있는 하루가 있다면?
리: 레드(카메라) 산 날?
따: ㅋㅋㅋㅋㅋ그게 그렇게 좋았어?
리: 네. 레드 산 날, 나 혼자서는 '성공했구나'라는 느낌이었어. 레드를 보면서 느꼈어. 물론 쥐뿔로 성공한 건 없지만,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성취감 같은 걸 많이 느꼈어. 강남에서 수령했거든. 레드 상자를 딱 받아들고 택시타고 오는데, 너무 감격스럽고 뿌듯하고 대견하고. 몇날 며칠을 밥안먹어도 배부르고... 진짜 그런 느낌이었어.
따: 운도 좋고, 긍정적으로 잘 살아온 리인규의 요즘 최대 고민은?
리: 되게 요즘 좋은데, 크게 걱정 없이 일도 잘 하고, 큰 불안도 많이 없어지고. 근데 이런 걸 어떻게 더 공고히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항상 있지. 작업실 부터 시작해서, 어떤 일을 어떻게 더 잘해야하나.
따: 아, 영화는 정말 하고 싶어?
리: 응. 영화는 한번쯤은 해야될 거 같아
따: 왜? 영화광 같은 건 또 아니잖아. 작업 범위, 관심 범위도 넓고.
리: 맞아. 솔직히 영화 자체를 엄청 좋아하거나 장르에 뜻이 있는 건 아니지만. '카메라 잡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내 이름으로 된 영화가 극장에 걸려야한다'는 게 있어. 그래야 어디가서 '저 카메라 합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저 배우입니다'하면 네이버에 프로필 걸려있는 것처럼. 커리어의 관점이야. 우선은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거야.
근데 하다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갑자기 영화가 진짜 좋아질 수도 있는 거고? 반대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커리어가 될 수도 있겠지? 모르지.
근데 확실한 건, 촬영감독으로서 '장편 영화를 극장에 걸어보느냐, 아니냐'는 정말 큰 차이일 거 같아. 유튜브에서 한발짝 더 가고 싶다. 유튜브 촬영감독으로 남고 싶진 않다. 극장으로 한번은 가야한다.
따: 시나리오 쓸 거예요?
리: 쓸 거예욧! 써볼 거야. 근데 막 정말, 연출에 욕심 이 있는 건 아니라서 재밌게 가볍게 써볼거야.
따: 왜 써보고 싶어?
리: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카메라도 그렇고, 연출도 그렇고 여러가지 파트가 있잖아. 사실 영화라는 종합 예술에서, 실제로 제작하다보면 경계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특히 카메라랑 연출은. 카메라만 잘하거나 연출만 잘하는 게 불가능해. 연출도 이미지 고민을 많이 해야하고, 촬영도 연출적인거나 이야기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해야하는 게 맞고.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연기 전공해서 어떤 장면을 만드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 걸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거든. 이야기를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하면 또 어떤 것들이 나올까. 그런 게 궁금하기도 해. 그동안은 모호하게 '내가 감정과 분위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건 있었는데, 한번쯤 명확하게 해보고 가면 좋겠어. 그리고 주변에 한강이나 따예나 연출 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관심갖게 되는 것도 있고.
따: 한동안은 너는 하고 싶은 얘기가 없다고 했잖아?
리: 지금도 하고 '이야기'는 없어. 나는 '무드'. 너무 중요한 거잖아.
그 무드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내가 파고들 수 있는 지점들이 카메라 바깥에도 있을 거 같거든. 카메라 바깥에서 내가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나 궁금하기도 해.
따: 잘 할 것 같아. 꼭 해봐(!!!!!) 별개로, 지금 하는 일은 계속 할 것 같아?
리: 촬영 일이요? 이건 무지개를 쫓는 느낌이라... 죽기 전까지 쫓다가 가지 않을까.
따: 그럼 네가 70살까지 살아있다면, 70살의 너가 카메라 프레임 안에 피사체라면, 그건 어떤 그림일까?
리: 그냥 마늘 까고 있을 거 같은데. 부엌에서 마늘 까고. 그냥 되게 여유롭고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있지 않을까?라는 저의 작은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