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가난하게 되었지?
무엇이 가난한 것인가? ‘가난’을 말할 만큼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가? 밥을 굶어본 적 있는가? 없다. 돈이 없어서 불편한 것이 있었던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시기 시기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돈의 세계 바깥에 있었다.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았고, 끼니를 굶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밥을 챙겨줬던 부모님이 있었다. 골목길 친구가 있었고, 고무줄놀이를 해가 어스름히 질 때까지 맘껏 할 수 있었고, 최소한의 통제와 자유가 있었다. 그거면 족했다. 어릴 적 욕망은 거기까지였다.
가난이 끼어 들 틈이 없었다. 가난이란 상대적이어서 주변에 가난을 더욱 가난답게 만들 장치들이 있어야 할 텐데, 내 이웃들의 집안 살림 형편도 거기서 거기였다. 단칸방에 공동화장실을 사용했고, 저녁 밥상을 준비하는 냄새로 옆집의 밥상 메뉴를 가늠할 수 있었다. 고기 냄새를 맡아본 기억은 별로 없다. 단칸방 하나에 네 식구가 살아갈 무렵, 반찬들의 종류가 딱히 떠오르지 않지만 ‘고기’는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었고, 1년 중 특별한 날은 제사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가난은 결핍을 말하는 것일까? 원하지만 할 수 없을 때, 밀려오는 상실감과 비슷한 느낌일까? 나는 내가 가진 것만큼만 원한다. 그런 성정을 지녔다.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정자와 난자가 잉태되기 이전부터 그런 존재였다. 가난의 어려움을 설파하는 이야기들 속에 쉽게 물들기가 어려웠다. 가난을 토로하며 힘듦을 내세울 때 맞장구치며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이야기를 듣다가 갸우뚱한 표정으로 어쩌면 상대방이 난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난처하지 않도록 맞장구쳐주는 기술을 터득했다. ‘나도 알아~, 그래 힘들었겠다’ 이렇게 ‘아는 척’을 하곤 했다. 친구들은 공감해주는, 공감하기 어려워도 공감해주는 척이라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진짜 공감을 하고, 안하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고개를 함께 끄덕여주는 것이 친구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가난에 대한 공감이 어려웠다. 왜 힘든 거지? 형편에 따라 고기반찬이 없을 수 있고, 매일 된장찌개 하나에 소시지 반찬 하나가 밥상에 올라와도, 괜찮았다. 물론, 된장찌개가 도통 무슨 맛인지 몰라 편식도 했다. 그래도 소시지 반찬이 있었기에 만족했다. 가진 것 이상 요구한 적이 없다. 가진 것 이상 욕망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난 가난을 모른다.
어쩌다가, ‘가난병’에 전염이 되어 있었나 보다. 유튜브를 너무 본 탓이다. 죄다 ‘가난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홍보하느라 여념 없다. 꽤나 자극적인 문구와 영상에 나도 모르게 클릭을 해버렸다. 걱정이 시작됐고 고민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완전히 가난했고, 가난했기에 아파야했다. 가난은 결핍이었고, ‘가난병’은 한 개인에게 결핍을 완전히 덮어 씌웠다. 결핍한 인간은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외부의 물건들을 찾아 헤맸고, 돈을 썼다. 발악하듯 결핍을 지우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돈으로 구입한 물건을 마주한 직후에는 결핍이 잠시 사라진 듯 했지만, 여지없이 결핍의 구멍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원하는 것이 많아지고, 갈망은 더욱 커지고 그럴수록 할 수 없는 것은 더 많아졌다. 온통 ‘할 수 없다’는 자괴감이 결핍의 자리를 채우고, 내 안의 소중한 것을 갉아먹었다. 그 소중한 것의 형체는 너무나도 불분명해서 고요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 알아챌 수 없다. 시끄럽고 분주하게 친구들을 만나 입을 나불대다 보면 소중한 것의 형체는 만질 수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아 더 이상 소중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중한 것이 사라진 나는, 과연 무엇이 되는 것인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감동하지 못하는 나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되새김질하면서 내 경험 속으로 파고 들어가 봐야한다. 가난하지 않았던 그때로, 가난할 수 없었던 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