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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Jul 02. 2024

소설 좋아하세요...

김영하 <읽다>

얼마 전 읽었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살짝 변주시켜서 제목을 적어본다.

당시음악가 브람스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생각이 제목에 녹여 있는 사강의 이 소설.

말줄임표로 끝나는 이 질문은 당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상대방의 의아하고 특이한 성향에 대한 물음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브람스를 좋아한다고 대답한다면 그야말로 아...라는 말 줄임으로 서로의 대화가 끝날 수도 있는 그런 질문.


그래서 나도 묻고 싶었다.


"소설 좋아하세요..."


김영하 소설가의 <읽다>를 읽으면서 줄곧 내 머릿속에서 부유하던 이 질문을 말이다.

마치 소설을 좋아하라는 강요의 문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말 소설이란 장르를 좋아하시나요...?'와 같은, 프랑스인들이 서로 주저하며 브람스를 좋아하냐고 묻고 했던 이 질문을 실은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다.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을 죽이는 일처럼 느꼈던 적이 있었다. 작가가 만든 허구의 세계에서 허구의 인물들이 허구의 삶을 사는 것을 응시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 소설은 단지 2시간 안에 인생 서사가 담긴 영화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고, 소설을 읽을 시간에 차라리 영화 안에 압축된 서사를 즐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독서를 할 거면 내 삶에 유익한 육아서나 자기 계발서 혹은 비문학 서적을 읽는 것이 내게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고 여겼었다.



시간이 흘러 현재 나는 거의 소설만 읽는다.


한국 장단 편 소설, 외국 소설 가리지 않고 읽고 있고, 고전 소설이라 불리는 것들도 내 손에 들려있다. 소설 편독이 심한 듯할 때는 산문 에세이 등도 읽고 있지만, 자꾸 소설에 손이 가는 건 나로서도 참 신기한 일이다.


왜일까.

왜 나는 소설을 기피하다 기피했던 소설에 빠지게 되었을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소설을 읽게 했을까.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
김영하 <읽다> 55쪽


함께 읽기. 소설 함께 읽기.

고전소설을 친구와 함께 읽은 지 일 년 하고도 반이 지나있다. 한 달에 한 권, 번갈아 가며 읽고 싶은 소설을 고른다. 완독 후 자신이 고른 그달의 소설에 대해 발제문을 만들고, 커피 한 잔으로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 동안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다. 함께 읽은 책이 이미 15권이 훌쩍 넘어 있다.


소설이 좋아서 시작한 모임이 아니었다. 책을 수단으로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이왕이면 낯선 문학, 이왕이면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고전소설을 함께 읽는 방법으로.


책이라서 그랬을까, 아니 소설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소설 속 깊은 바다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헤엄치다 잠시 뭍으로 올라와 각자 나름의 감동과 여운을 쏟아낸다. 쏟아낸 감동과 여운이 맞아떨어질 때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지만, 쏟아낸 그것들이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는 더한 희열과 환희를 느낀다. 마음의 양식이 철철 넘쳐흐른 채로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것이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다.
84쪽


소설가 김영하는 <읽다>에서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헤매기 위해서라고.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가 바로 헤매기 위해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라고.


기꺼이 낯선 세계를 어슬렁거리고 이 길을 가다 저 길로 가고 다시 이 길로 돌아오고 배회하는 자발적 산책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자발적 산책자다.

어슬렁거리며 조우하는 것들에 잠시 시선을 둬보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어슬렁거리며 이 세계를 창조한 작가를 잠시 떠올려보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잊혔던 나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나라면 과연, 너라면 과연 우리라면 과연...이라는 가정을 허공에 던져보면서.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고유한 헤맴,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이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친다.
86쪽


유일무이 고유한 헤맴의 경험인 소설 읽기.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나는 나의 내면에 하나의 유일무이한 작은 세계를 새긴다.

소설 속 세계에서 더 깊이 더 오래 더 많이 유영할수록 나는 내 안에 무한한 세계를 장착할 수 있다.

그 세계들은 무수히 겹쳐지고 겹쳐져 내 안에서 또 다른 형태의 세계들로 변모한다.

점차적으로 그것들이 내 안에서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만든다.


나는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만의 소설이 된다.



소설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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