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할 새가 없다. 이어진 종목은 200m 달리기. 200m 종목은 보통 400m 트랙의 절반을 뛰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예상대로 될리가 없다. 캠퍼스 한켠에 한 바퀴 200m인 초미니 트랙이 있던 것이다. 올해 200m 종목이 처음 생기면서 학교 안에 트랙을 새로 만들었다고 듣긴 했는데, 그정도 공간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응, 400m 트랙을 만든다고는 안했다. 200m 트랙 한바퀴를 도는것이 우리의 미션이었다.
문제는 세가지이다. 시험 날은 땅이 꽁꽁 어는 1월 초중순의 겨울이라는 것, 얼마전 눈이 온 상태라는 것. 그리고 200m 트랙의 코너는 400m 트랙보다 훨씬 더 좁고 급하다는 것이다. 미끄러운 트랙 위에서 평소 연습해보지 못한 급격한 코너링을 하며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총 3명이 초시계로 기록을 측정하고, 중간 기록을 최종 기록으로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반복점프를 망친 나는 200m 종목에서 반드시 만회를 해야했다. 32초 10은 나와야했다. 최대한 지금 종목에만 집중하려 애를 썼다. 긴장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하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탄식이 들렸다.
"오! 오오! 엇....! 아아...."
스타트부터 너무나 잘 뛰던 한 입시생이 코너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것이다. 초를 기록하던 감독관 역시 자기도 모르게 아쉬워하는 듯 했다. 넘어지지 않았다면 30초대도 가능했을거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심 안심, 다행스러움 등 나쁜 마음이 들었다. 뒤이어 절대 남일이 아니라는 공포도 엄습했다. 반복점프 망한거 지금 생각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언제나 위기는 나의 각성제였다, 위기는 한번도 나를 쓰러뜨린 적이 없다, 라는 이상하지만 강력한 말들로 마음을 다잡았다.
'32초 1. 32초 1.'
내 차례가 왔다. 이름과 수험번호를 말하고 스타트 라인에 섰다. 스타팅 블록은 몇번 연습해봐서 익숙했다. 살짝 눈이 내렸던것도 같았다. 천천히 내리는 눈 속에서 불꽃처럼 튀어 나가야했다. 호흡은 고요했고 마음은 치열했다.
내가 지금 빠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흡이 일정하고 간결했다. 첫번째 코너를 매끄럽게 지났다. 두번째 코너에 들어가는데, 학원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솔아! 끝까지 뛰어!"
마지막 스퍼트를 올려 결승선을 지났다. 숨도 별로 차지 않았다. 기록이 몇일까. 32초 1? 2? 내가 느끼기엔 빠른것 같았는데. 머뭇거리거나 리듬이 흐트러지도 않았는데. 코너링이 익숙치 않아서 시간 좀 까먹었으려나.
31초 7
200m 실기 시험은 31초 7이었다. 최상위권 기록이었다.
9회말 2아웃. 나는 만루홈런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