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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이 Mar 31. 2023

추리닝만 입는 여자

이제 다음 달이면 퇴사 1주년이다. 2022년 4월 29일이 마지막 근무일이었으니 정확히 29일 뒤면 퇴사한 지 1년이 된다.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는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찍은 점들(스티븐 잡스의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문에서 언급)에 나는 만족한다. 생각보다 빨리 번역일감을 맡았고 경제적 보상도 내 목표 예상을 넘어섰다. 내 목표가 너무 낮은 탓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번역 프리랜서로 내 삶의 방향을 바꾸면서 좌절도 많이 하고 내 손에 거머쥐는 번역료를 수도 없이 내가 받던 월급과 비교했다. 정말 머릿속을 깨끗이 지우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내가 원해서 선택했던 길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가 이렇게 비교를 하는 내 머릿속이 너무도 싫었기에.


아이가 있는 방학이 아니면, 난 대부분 집이나 카페에서 일이든 공부를 한다. 요즈음은 아예 카페로 출근(?)을 한다. 시간이 갈수록 번역이 없는 날 집에 있으면 널브러지는 일이 잦아서다. 또한, 핑계를 대자면 지난겨울방학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삼시 세끼를 차려야 하는 두 달간의 생활이 힘들었고 이제야 나의 시간을 가지면서 못 봤던 드라마나 영화들이 나에게 자꾸 손을 뻗는다. ㅎㅎ


드라마나 영화에서 얼핏 보이는 프리랜서의 모습은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 시켜놓고 머리는 대충 핀으로 올리고 자판을 두드린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렇게 틀린 현실은 번역가님들이 쓴 책을 보기 전 대학원에서 교수님에게 먼저 들었다. 실제 모습은 마감에 허덕이며 기본적인 세안이나 머리 감기조차도 미루기 일쑤라고.


맞다. 하지만, 매번 그렇지는 않다. 왜냐면, 난 그렇게 유명한 번역가도, 일감이 많은 번역가도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번역 마감 시간이 매우 촉박하여 손이 떨린 적도 있다. 아이 저녁을 먹이고 학원을 보내야 하는데 1분의 시간도 여유가 없어(PM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잘못되어) 배달앱이 깔린 내 휴대폰을 아이에게 주고는 말로 아이에게 주문과 결제까지 시킨 적이 있다.



내 생활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중에서도 이렇게 봄날이 오니 나의 옷차림에 눈이 갔다. 지난겨울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약속이 없는 한 나의 옷차림은 추리닝이다. 브랜드가 다른 바지 두 벌을 돌아가면서 입는다. 재작년 겨울 정장은 작년 겨울부터 여전히 비닐에 덮여 옷장에 얌전히 걸려 있다. 단지 검은색 정장 한 벌만 비닐을 벗기고 한 번 입었다. 가장 친한 친구 아버지가 작년 말에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을 가야 했기에.


나는 그렇게 단벌 아닌 두 벌의 옷만 즐겨 입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엄마들 모임이나 친구를 만날 때 옷이 여간 고민되는 것이 아니다. 앞 전 회사는 출근 드레스 코드가 확실했다. 캐주얼 정장도 용납되지 않는 비즈니스 정장. 가끔은 가슴 조마조마하며 캐주얼 정장을 입기도 했지만...

그렇다 보니 정장과 운동복 중간에 입는 옷이 없는 것 같다. 친구에게 살짝 고민되어 얘기를 했더니 청바지를 권했다. 하지만, 카페에 가면 적게는 4시간 혹은 6시간까지도 있는데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기에는 이제 너무나도 편한 추리닝 바지에 익숙해져 버렸다.


하루 날을 잡고 백화점에 가서 좀 편한 옷을 살려고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옷이 없었다. 카페에서 일하기 편한 옷도 매우 드물었고, 한 두 개 발견을 해도 너무 고가였다. 지금은 날이 조금 더 더워지기를 기다린다. 왜냐? 원피스를 살 계획이다. 너무 정장틱하지 않으면서도 편한 원피스. 그럼 추리닝과 번갈아 가면서 입을 수 있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의 기준이다. 나 스스로 문득 옷에 의문이 들어 눈길이 갔고 해결책 또한 내가 냈다. 다만, 쇼핑을 즐기지 않기에 하루 날 잡아서 쇼핑할 게 지금부터 피곤할 뿐. 쓰고 보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이다.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내가 퇴사한 이유를 생각하고 지금의 나에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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