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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Dec 05. 2019

아이가 아프면 우주가 무너진다

그래도 다시 돌아왔다


근자에 나는 입방정을 떨었다. 글로도 방정을 떨었다. 생각은 그 보다 더 나아가 있는 대로 방정을 떨었다. 우리 하마는 밥을 잘 먹어 건강하다고. 다 내가 잘 먹인 덕이라고. 5살이 되니 확실히 어릴 때 보단 덜 아픈 것 같다고. 내 삶도 굉장히 살만해졌다고. 3살 배기를 키우는 옆팀 동료가 육아와 일의 양립 문제로 골머리를 앓길래 시답지 않은 조언도 했다. 고작 애 하나를 꼴랑 2년 더 키웠을 뿐인데 말이다. 돌아보니 얼마나 오만했던가. 아직도 이렇게 아기인데. 하룻밤이라도 습도나 온도가 잘 맞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는 여린 존재인데.


아이는 지난주부터 간간히 기침을 했는데 우리 아이의 면역력과 체력을 맹신하며 자연스레 치유될 거라고 믿었다. 한 달에 한번 밤에 하는 천문대 수업도 갔고 밤 10시까지 친구들과 뛰어놀게 놔두었다. 너무 안일했던 거다. 지난 금요일부터 기침소리가 심상치 않더니만 밤중에 처음으로 40도가 넘는 체온계 숫자를 확인하고야 말았다. 부랴부랴 해열제를 찾으니 이미 유통기한이 4개월 넘어가 있었다. 비가 쏟아지던 그 새벽 남편이 뛰쳐나가 타이레놀을 사 왔다. 그렇게 지독한 열동반 기침감기가 시작되었다. 주말 중에 다 낫기를 바랐지만 그럴만한 감기가 아니었다.


월요일이 되었고, 아이는 유치원을 갈 수 없었다. 가족 중 누군가는 집에서 온전히 아이를 돌보아야 했다.
워킹맘 입장에선 이런 상황이 너무 힘들다. 왜냐하면 마음속으로는 아이가 안쓰럽고 종일 옆에서 지켜주고 싶은데 현실에선 남은 연차 개수와 업무 로드, 회의 일정을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부모님과 휴가 일정을 조율해야 했다. 메신저로 전화로 어른 넷이 머리를 맞대고 각자가 온전히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을 논의한다. 아무도 안 되는 날이 있다면 그 중요도를 따지고 누군가는 기존 일정을 포기한다. 우리 모두는 아이를 매우 사랑하지만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지만 각자에겐 우리 모두를 위해 이어가야 할 생업이 있다. 당장은 모두 내려놓고 아픈 아이에게 집중하고 싶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각자 사회에서 책임지고 있는 일에 큰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로만 자리를 비우는 것이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을 위한 일이었다. 이번엔 반나절씩 쪼개 조율을 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진 누가 그 이후엔 누가. 최대 1주일을 등원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1주일의 보육 시스템을 갖추었다. 다른 가족이 아이를 돌보는 날엔, 업무 공백을 메꾸기 위해 일찍 출근한다. 이 펄펄 끓는 아이를 뒤로한 채 문을 닫고 나오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제대로 사는 게 맞는가> 싶지만 그래도 어찌 되었건 버티게 되었다. 친정 부모님이 지척에 계셔서, 아무것도 재지 않고 언제든 발 벗고 도와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번에도 친정 부모님이 없었다면 나의 멘털과 체력 모두가 바스러졌을 것이다. 2년 전 버틸 수 없이 겨우 내 존재나 연명하던 그때처럼 말이다.


지난 화요일에는 내 당번이었다. (당번이라는 표현이 좀 맘에 들지 않지만 마땅히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종일 휴가를 썼다. 열에 시달리느라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고로 10시 반까지 느지막이 잠을 자고 일어나 죽을 끓여먹고 놀다가 12시쯤 병원에 갔다. 혹시나 싶어 이런저런 검사도 했다. 지금껏 아팠던 것보다 더 아팠기 때문인지 우리 하마는 왠지 긴장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모든 긴장을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표정으로 풀어낸다. 집에 돌아온 뒤 아픈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놀다가 체온을 재보곤 또 서둘러 해열제를 먹였다. 밥을 해 먹고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들을 했다. 뭘 했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픈 와중에도 나와 낮에 집에서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 좋았나 보다. 마치 꿈에 그리던 하루를 보낸 듯한 아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렸다. 지금 유치원은 그렇지 않은데 작년에 다녔던 어린이집엔 전업으로 아이를 보는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아무리 시간을 쪼개 노력한다고 해도 그들이 아이와 보내는 양적인 시간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이가 그들을 보며 부러워하겠다는 생각에 늘 너무 미안했지만 우리 아이가 크게 개의치 않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왠지 아이는 그다지 괜찮지 않았다고, 어쩌면 제 나름대로 포기를 하고 그걸 내색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마음이 아린다.


쉬는 김에 쭉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금요일까지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금요일엔 정말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미리 휴가도 내두었다. 목요일 병원에 가니 유치원에 등원해도 될 것 같다고 하길래 금요일엔 유치원에 보내고 나는 눈칫밥 먹으면서 쓴 그 휴가를 취소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화요일 저녁 아이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린다. 그깟 눈칫밥 100 공기는 더 먹어도 될 것 같다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에도 느지막이 일어나서 함께 근처 영화관으로 가 겨울왕국 2를 보고 집에 돌아와서 우동을 끓여먹고 종일 잉여롭게 놀았다. 이런 일상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지만 또 다른 형태의 괴로움 - 커리어, 금전 문제 등- 이 시작되겠지. 정답이 없이 오로지 선택만이 중요한 이 문제 앞에서 늘 갈길을 잃는다.

아이가 아프니 우주가 무너졌다. 그래도 다시 돌아왔다.

어제와 다른 오늘은 예고 없이 왔다가 지나갔다. 짧은 가정 보육 후 우리 하마는 이제 다 나아서 유치원도 가고 다시 개구쟁이가 되었다. 비슷하기만 한 고루한 일상이라는 푸념이 정말 배부른 소리라는 걸 이렇게야 깨달았다. 전날까지 귀찮다고 미뤄뒀던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걸 상기하며 귀찮아도 다시 한번 해야 할 일에 열심을 내어 본다. 평온한 아침이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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