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Fighting), 싸우는 삶의 언어

[서사의 분말상자] 2018.2.18.

by 림팔라

길다면 짧고 짧다면 짧은 설날 연휴가 끝이 났다.
연휴는 평소보다 짧았지만, 짧았기 때문에 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아 오히려 여유로웠다.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고, 허리가 아플 정도로 계속 누워있었으며, 별 의미없는 핸드폰 게임이나 맘껏 하며 지냈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낙원이 아니었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은 우리의 앞으로의 오랜 여정 동안 그렇게 자주 있지 않을 것만 같다.

집에 있다보면 평소엔 챙겨볼 리가 없는 TV프로그램도 그냥 보게 된다.
간만에 '복면가왕'을 봤는데, 이번 주는 1라운드 주였기 때문에, 언제나 그랬듯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의 근황에 대한 내용이 프로그램의 주축을 이루었다. (근데 아마 손승연이 나온 것 같다. 목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그 중에는 옛날에 무한걸스같은 곳에서 가끔 보던 배우 정시아도 있었다. 지금은 결혼하고 애도 생겼다고 한다. 1라운드에서 떨어진 그녀는 줄리엣의 '기다려 늑대'라는 노래를 불렀다. (가사 내용은 연애 상대에게 개수작부리지 말라는 것을 최대한 발랄하게 묘사한 내용이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노랜데, 뭔가 발랄한 느낌이 맘에 들어 벅스로 앨범을 들어봤는데, 생각보다 앨범 퀄리티가 상당했다. 특히 기타 리프가 아주 말끔했고, 위트있는 보컬이었다. 요즘 노래 중에 비슷한 느낌을 찾자면 오지은과 늑대들 정도? 거기서 조금 더 만화 주제가 같은 기분을 담으면 될 것 같다. 앨범 수록곡 중 내 눈을 잡아끄는 제목이 있었다.
'괴롭냐'


가사는 첨부한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는 두유 노우 비빔밥보다는 조금 더 실질적인 코리아 라이프를 보여주는 곡이라고 여겨진다. (기타 리프가 어울리지 않게 세련되니 Inst.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골뱅이 안주에 소주를 마시면서 유달리 괴로워하는 동료에게, 우리는 상투적인 위로를 던진다.


F.I.G.H.T.I.N.G 파이팅!


아마 요 며칠 간 가장 자주 들은 영어단어가 아닐까? 하루 종일 테레비에 나오는 평창 동계올림픽 선수들도 항상 외치고, 시험을 앞둔 내게 용돈을 건네주시면서 말해주시기도 하고, 다 같이 건배할 때도 빠지지 않는 단골 단어니까.


아시다시피, 힘내라는 의미로 fighting을 쓰는 나라는 우리 나라 이외에는 없다. 인스타그램 같은 데서 K-pop을 사랑해주시는 수 많은 해외 팬들이 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fighting과 cheer up이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는 용례에 대부분의 영어권 사람들은 어색함을 느낄 듯 싶다. 어쩌다가 우리 나라에는 이런 콩글리쉬가 생겨나게 된걸까? 찾아보면 당연히 유래가 있을 듯 싶어 논문을 검색해봤지만, 내 내공이 부족한 탓인지 의외로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단어의 원 의미를 바탕으로 추측해보는 방법이 고작이다. fighting의 원 의미는 당연히 싸우는 것/싸우는 중이다. 이게 '힘 내!'와 동치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야, 힘내!'라고 하는 것과 '○○야, 싸우는거야(싸우는 중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히 같은 의미이다. 힘을 내야만 싸울 수 있고, 싸워야하기 때문에 힘을 내야 한다.
힘을 내라고 이야기할 때, 보통 그것은 버거운 삶에 지쳐도 다시금 그 삶의 기저를 지속해나가라는 의미다. 삶을 진행해가는 것,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싸움과 정확히 같은 것이었던 게 아닐까.
자유주의 진영의 누구인들 그렇지 않겠냐만, 한국인의 삶의 중심이 되는 알고리즘은 상대적으로 '경쟁'에 기울어져 있다. 입시나 취업은 말 할 것도 없고, 학교나 직장 내에서도, 그 어떤 곳에서도, 생활양식 속에 경쟁의 논리가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심지어 세상의 모든 풍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마음 속 작은 신화를 품고 돌아온 가정과 친척집에서도, 경쟁이라는 불꽃은 암암리에, 혹은 누군가에겐 칼바람처럼 들러붙는 것이었다.


싸워나가야만 하는 삶. 삶이 곧 싸움이고 싸움이 곧 삶인 하루하루에 대해, 우리는 푸념할 여유조차도 별로 없다. 때때로 누군가가 그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털어놓는다고 해도, 옆사람이 해줄 말이라곤, 불타는 현실을 상기시키는 단어뿐이다. 우리는, 싸우는 중이야. 힘내서 싸워야만 해. 싸우기 위해서 힘을 내야만 해. 단 것을 먹고 좋은 생각을 잔뜩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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