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일. 무제.
[서사의 분말상자] 2018.3.14.
마지막 글이 2월 18일이었으니, 여기에 글을 쓰는 것도 24일 만이다.
끝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어느 순간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라 내버려 둔 새에 사라지는 것 같다.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의 마지막 순간은 팔이 부러지거나 눈알의 검은자가 지워져 버렸을 때가 아니다. 어느 만화에서 말했듯, 잊혀졌을 때다. 그런 장난감이 있었나? 싶은 채로 장난감 상자 깊은 곳에 남겨지는 순간이 그의 마지막 순간이다.
요즈음 갑작스럽지 않은 작은 서사의 상실을 경험 중이다.
스터디로 가득찼던 2월이 끝나고, 또 다시 새 학기가 열리고, 내년에 성취되었어야 할 욕망(=닌텐도 스위치)을 생각보다 아주 빨리 내 손에 집어넣어버렸다. 그럭저럭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순간들 속에 반짝이거나 발자국을 남기거나 지평의 확장을 경험하게 해주는 가루들은 없었다. 사실 지금도 없다. 애써 떠올려보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아마 애써 짜내려 해도 좋은 것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오늘은 정서적 시간의 흐름상 가끔 있는 '연속이나 미분불가능한 점'이라서, 그저 기록의 용도로 적어두려 한다. 오늘은 왜 평탄한 다른 날과 다른 뾰족한 날이어야 하는지.
일단은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다. 분명히 어제까지는 어쨌든 겨울이었는데, 오늘은 갑자기 불봄이다. 숫자로 더울 걸 예상하고 얇게 입었음에도 그 예상의 두 배는 덥다. 내내 따뜻한 국물요리만 먹고 돌아다니던 내가 오늘은 시원한 냉라멘을 먹고싶게 되었고(실패해서 매운소보로라멘 먹었지마는) 주변 사람들의 옷차림도 바뀌었고, 중앙광장에서는 동아리박람회가 한창이다. '다다미 넉장 반 세계일주'(모리미 도미히코)가 떠오른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같은 작가다.) 이 며칠 안되는 아지랑이 필 듯 뜨거운 모임의 회오리바람에서, 아마 그들은 가장 현명하지는 않은 선택을 저지를 것이고, 어떤 선택을 하든 아무 것도 고르지 않았을 때보다는 풍성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는, 그런 선택의 기회가 앞으로의 긴 여정 내내 겨우 저 짧은 순간 만큼 밖에 없을거라는 사실에 허탈해할 지도 모르겠다.
둘째는 오늘이 3.141592...로 근사되는 π와 앞자리가 같은 파이데이이며, 동시에 현대 우주과학의 어머니이자 아버지,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스티븐 호킹이 역사 속 인물로 남으시게 된 날이기 때문이다.
비록 나에게 호기심과 광활함을 불러일으킨 책은 직접적으로 호킹은 아니었고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같은 것이었지만, 호킹이 없었다면 그 기류의 모든 이론들이 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운명의 톱니바퀴라는 게 있는 것인지, 이 수학적인 날에 끝맺음을 짓다니. 참으로 신화적인 결말이다. 나도 불사를 선택할 수 없다면, 최소한 아주 예쁜 숫자의 조합이 이루어진 날에 마지막 별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의 작은 오늘의 서사는 별 일이 없이 흘러갑니다.
연속이고 미분가능하고 심지어 상수함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변에서 물폭탄이 펑펑 터져도, 마음 속에는 파도가 치지 않는 하루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