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뇌는 아마도 과거를 기억하는 영역의 중추가 그리 발달하지 않아서, 10년 전 기억은 커녕 몇 달 전에 경험했던 즐거운 시간들조차 오래 기억되지 않고 쉽사리 사라지곤 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조각조각으로 남아있는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이번 글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자주 보았던 학습만화에 대한 추억이다.
혹시 나와 비슷한 세대로 자라났다면 이 만화를 기억할 지도 모르겠다. '둘리의 배낭여행'이라는 애니메이션인데, 둘리와 친구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영어를 익히고 노래도 부르곤 하는 내용이다. 둘리가 어느 나라를 돌아다녔는지, 무슨 사건을 겪었는지, 어떤 단어를 익혔는지는 이제 와서 당연히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만, 이 명장면 하나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둘리와 친구들은 어쩌다가 어느 동굴에 갇히게 된다. 그 곳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마법의 양탄자가 필요한 상황인데, 동굴의 어느 절대자가 나타나서 자신이 내는 영어 단어 문제를 맞히면 그 양탄자를 주고, 맞히지 못하면 동굴 밑 상어떼의 먹이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한다. 다행히 교과과정 영어교육을 충실히 이수한 고길동 선생님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송곳니(Canine tooth)라는 고급 단어까지도 풀었는데, 마지막 문제인 어금니에서 끝내 막혀버리고 만다. 모두가 절망하는 그 순간에, 난데없이 희동이가 이렇게 외친다. "몰라! 몰라!" 모른다니. 차라리 아무 단어라도 외쳤으면 조금이라도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을텐데, 이젠 꼼짝없이 생을 마감할 일만 남아버렸다. 그러나 그 순간, 기적적인 절대자의 응답이 들려온다. "아니 이럴수가....그래 맞아! 어금니는 영어로 Molar(몰라)라고 한다...!"
둘리 일행은 무사히 탈출했고, 이 인상적인 장면 덕분에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금니가 영어로 몰라라는 사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을 향한 걸음마를 내딛는 중인 요즈음, 어금니의 영어 단어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삶의 자세를 그 장면에서 배웠어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중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몰라!'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죄가 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모르는 만큼 궁금증도 많았고, 스스로의 무지를 털어놓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모든 것에 '왜?'라고 물었고, 사람들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에 맞는 성실한 대답을 선물해주었다.
조금 자라서,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갈 때쯤에는, 그 어린 시절에 마음껏 알아낸 지식이 남들보다 적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경우에는 보통 주변 친구들도 알지 못했다. 선생님은 모든 정답을 알고 있다는 것 쯤은 상식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물어보는 것은 그 부끄러움에 대해 예외인 사항이었다. 따라서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굳이 또래집단에게 모른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조금 더 커버려서, 모르는 걸 물어볼 선생님이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어느새 나는 '내가 무엇을 모른다'라는 부끄러운 진실을 다른 누군가에게 밝히기 어려워하는 사람으로 자라나있었다.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감추려 하면 의외로 쉽사리 감출 수 있는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적당히 아는 척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야기의 맥락 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반드시 진실일 수 밖에 없는 명제들'만을 재언급하는 방식 등을 이용해서 나는 충분히 '내가 모른다'는 비밀을 홀로 간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소크라테스가 부활해서 '반어 문답법(Eironeia)'을 나에게 시전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경우에는 속여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른다는 사실을 숨겨갈수록, 나는 점점 더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것이었다. 지식의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외강내유)은 갈수록 심화되고, 생동감 넘치는 혀와 나태로 가득찬 뇌 사이의 부조화가 점점 나를 갉아먹었다. 소피스트를 향한 기원전 시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비판이 21세기의 나에게도 유효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기에, 나는 가장 박식한 멍청이의 늪을 벗어날 수 없다.
요즘 교육심리학을 공부하다가, 목표지향이론에서 이야기하는 '숙달목표와 수행목표'라는 개념을 보게 되었다. 학습자의 학습 동기와 연관된 이야기인데, 쉽게 이야기해서 숙달목표는 '스스로 그 학문의 내용을 탐구하고 싶어서' 학습하는 것이고 수행목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기 위해서' 학습하는 것이다. 각각의 목표가 다시 접근목표와 회피목표로 나누어지는데, 문자 그대로 접근 목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고, 회피목표는 그 목적을 위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에게 내가 문제를 잘 푼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접근하는 목표가 '수행접근목표'라면, 내가 풀지 못한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피하는 목표가 '수행회피목표'이다. 자연스럽게 수행목표를 지향하는 학생들의 경우, 풀만한 문제를 보면 득달같이 풀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어려운 문제를 보면 풀려는 시도조차 피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은 도무지 수행목표의 수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모른다는 걸 밝히지 않고는 새로운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필요한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 대상 앞에서, 내가 지금은 너를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만 한다. 유식의 가면을 벗어던져야, 무지의 맨 얼굴 위에 자그마한 페이스 페인팅을 그려넣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솔직히 밝힌다. 내가 말하는 수 많은 것들 중에 대부분은, 사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고, 특히 너에 대해서는 정말 요만큼도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