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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팔라 Mar 19. 2019

시지프스의 손목시계

[서사의 분말상자] 2018.9.12.

1. WATCH

2년 정도 쓰던 시계가 어느 날 멈춰버려서, 새 손목시계를 장만했다.
사실 시계가 고장났을 때는 딱히 새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막상 없으니 생각보다 곤란한 순간들이 있더라. 손목시계는 장식품이 아니라 실용품이었던 것이다.  

손목시계의 부재가 주는 가장 큰 문제점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루 중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명시적 의미가 없는 시간들을 너무 알차게 즐기게 되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네!'가 늘어났다는 말이다. 그다지 단점처럼 들리지 않을 수 있게 서술했으나, 시간에 얽매이다 못해 매달리다시피 해야 하는 것이 미덕인 지금의 입장으로서는 위험했다.


시계를 고를 때 고민하는 여러 가치들이 있겠다. 디자인, 무브먼트, 브랜드, 기타 등등. 이전 시계를 고를 때는 좀 더 치열하게 고민했었지.
그러나 이전의 싸구려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통해 이미 시계의 내부 장치가 줄 수 있는 우아한 역동성 따위는 적당히 맛을 보았다.
또한 시간 측정의 정확도는 통신이나 전기 보급로가 박살나지 않는 이상, 어차피 아날로그 손목시계로써는 싸구려 스마트폰에도 비빌 수 없는 수준이라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적당히 지금 해야할 일을 되새겨주는 시간의 이정표 수준이면 되었다.


결국 남는 것은 '상징'이었다. 롤X스니 태그O이어니 하는 브랜드는 장수풍뎅이의 뿔, 공작의 꼬리깃 같은 것에 불과하리라. 생존과 관련없는 것에 이렇게 투자할 수 있을 만큼이나 강하다는 상징체계. (물론 문화자본의 축적이 만들어내는 카르텔적인 소득 창출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나로서는 알 바 아니다.) 지금 나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좀 더 내 기분에 가까운 상징이 필요했다.


2. SISYPHUS


그렇게 인터넷을 뒤지다가 발견한 것이 이 시지프스 시계.
특징점은 초침 대신 사람이 끊임없이 바위를 민다는 점 뿐이다.
시계의 가격을 밝히는 것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으므로 말하지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초침이 저 모양이 아니었다면 아마 판매가가 절반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걸 산 이유는, 오로지 하나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시간을 굴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이리도 고된 일이구나."


만화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본 지도 벌써 15년은 된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와, 바위를 평생 굴린다니, 힘들겠다.' 정도로 생각했던 듯 하다. 아마 시지프스가 신들이 잘못한 걸 일러바치다가 잡혀갔나 그래서, 당시에 스스로를 정의의 투사라고 생각했던 나는 어딘가 감정을 이입해 잔뜩 억울함을 느꼈던 것도 같다.


지금은 삶의 요령이 조금 늘어서, 예전보다는 여러 의문이 든다.
시지프스의 지옥은 그렇게 힘들까? 물론 문자 그대로 '힘'이 엄청 들긴 하겠다만, 불에 타던가 간을 쪼아먹히던가 하는 거 보다는 봐줄만 할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죽지도 않고 평생 하다보면, 범우주적 피트니스센터 느낌으로 몸도 엄청 강해져서 할 만해지거나 하진 않을까? 시지프스가 그렇게 다른 신들이 포도 먹고 바람 피면서 놀러다닐 동안 열심히 몸을 길러서 신들에게 복수하는 시놉시스도 분명 누군가가 이미 써서 발표한 적이 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내 눈으로 본 적은 없다.


어쨌든 상대적으로 지옥치고는 좀 낫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내가 그래야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긴 하다. 다만 그 이유가 어릴 때 생각하던 것과 좀 다르다. 지금 내 입장에 서서 생각하기에, 시지프스가 힘든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영겁'과 '의무'. 아니다. '무의미'까지 쳐서 세 가지로 볼 수 있겠다.


3. HELL


시지프스의 지옥에는 성취감이 없다.
바위를 굴리는 일에는 딱히 어떠한 의미가 없다.
바위가 그렇게 굴러다녀야만 생태계의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는 구조도 아니며, 체력단련의 의의도 인간 신체의 한계에 도달하면 무의미해질 것이고, 바위를 굴리면 캐시나 스킬포인트가 모여서 그것으로 새로운 장비를 구매하거나 유용한 스킬을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세상이 통째로 사라지지 않는 한, 끝없이 계속해야 한다. 무한한 권태감과 좌절감은 이러한 방식으로 부여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무의미의 순열들.


그러나 부담감은 있다. 시지프스의 지옥은 자유시간까지도 속박한다는 점에서 특히 강력하다.
가끔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는데, 희한하게도 밤까지 공부를 하는 날이, 그렇지 않은 자신을 자책하며 누워있던 날보다도 피로도가 적더라. (물론 하루 그렇게 빡세게 굴리면 이틀은 이런 저런 이유로 그렇지 못하게 되는 걸 보면, 피로도가 표출되지 않고 축적되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제 디데이가 눈 앞이고, 공동의 과제도 당분간 없어져서, 커다란 자유감을 며칠 느끼긴 했지만, 결국 과제가 없으면 절제하지 않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책은 피로를 낳고, 피로는 또 다시 권태와 무기력을 부르는 악순환이 또 나를 찾아온다. 결국 바위를 굴리라는 의무는 그걸 굴리지 않을 여유시간을 좀먹는다. 지옥에서 벗어날 몇 안되는 통로에서, 시지프스의 문지기는 아주 영리하게 우리를 침수시킨다.


그럼에도, 그렇기에, 때때로 도망가고 싶다.


요즘은 다자이 오사무나 알베르 카뮈를 보고 있다. 손목시계가 있어도 책을 고르는 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를 버리기도 했지만, 그런 날엔 어김없이 시지프스의 문지기가 찾아오지만, 어쨌든 다른 경치도 좀 늦기 전에 보고 싶어서 이 책 저 책을 돌아다닌다.


마침 카뮈도 시지프스 신화를 퍽 눈여겨 보았나보다.
카뮈는 인류가 신이 부여한 '삶'이라는 시지프스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유일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바위 굴리기에서조차, 그 의미를 한껏 체감하며, 그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찬미하는 것이다. 더 이상 지옥이 지옥이 아니게 되도록, 권태와 무의미와 속박과 영겁의 시간이 어떠한 호소력도 지니지 않도록.


참,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니. 그 쉬운 길을 놔두고 여전히 하루하루를 바위를 굴리며, 그 형벌의 무게에, 듣고 있기 지겨울 정도로 신음하고 있는 나는, 도대체 얼마나 신실한 어린양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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