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여름인가 싶더니, 어느새 썬크림이 없어서는 안될 계절이 다가와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며칠 간 땡볕을 걷다 보니, 양팔이 벌겋게 타들어간다. 살짝 따끔하다. 작열하는 태양에 데워진 공기는, 잠깐 그 공간에 속하기만 해도 내 남은 기력을 다 빨아먹을 정도로 드세다. 왜 이렇게 뜨거운거야. 차라리 더위도 못 느끼고 따끔하지도 않은 몸이면 참 편할텐데.
인류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고통을 감각한다. 왜일까? 초등학교였나 중학교 때 배운 조건 반사에 대한 내용이 떠오른다. 우리는 가시에 찔리거나 뜨거운 불을 만졌을 때, 순간적으로 따끔한 감각을 느끼고 그 고통의 원천에서 손을 뗀다. 뇌가 시키기도 전에 척수 단계에서 반사적으로 그러도록 시킨다. 만약 아프지 않았다면, 가시나 불에서 재빠르게 멀어질 생각을 하지 않겠지. 그러면 가시는 계속 피부에 박혀있을테고, 손은 뜨거운 불에 의해 녹아내릴 것이다. 그 상태가 지속되면 우리는 죽는다.
즉,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위기 상황을 인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전반성적으로 알아챈다. 따끔한 촉각자극은 인류가 자신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하기 위해 만들어 낸 방어체계의 선봉장이다. 즉, 아픔을 느끼는 순간에 비로소 위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후각이 익숙한 냄새에 금세 둔감해지는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주변 환경에 익숙해지지 않은 채 타자성을 유지해서는, 새로운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서는 상황을 바꾸어나갈 수 없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고들 하지만, 사실 익숙함이 없다면 그 소중함을 느끼기도 전에 영영 사라져버릴 지도 모른다. 이러한 아픔과 권태란 결국 위험 요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원시 생물체 시절부터 아주 오랫동안 마련되어 온 생존수단이다. 수단은 결과가 아니다. 아픔과 권태는 위기로부터 벗어날 유용한 도구일 뿐이며, 그것을 행위의 도착점 또는 목적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삶은 피곤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것은 아니다. 당면한 수많은 위기 상황을 아픔을 이용해 벗어났다고 한들, 그것이 유난히 위기가 많은 이 뜨거운 여름의 순간이 사실은 낭만적인 청춘의 단편이라는 방관적 추억 보정의 증거가 될 리는 없다. 또한 고작 몇 가지의 위기를 벗어나며 경험을 축적했다고 해서 그것을 성숙·성장이라고 받아들이기엔, 오늘날의 위기 요소들이란 너무도 끝없이 다채롭고 예측하기 어렵다.
아픔과 권태는 그렇게 아름답거나 소중하기 그지없는 존재는 못 된다. 꽤 귀찮지만 또 아예 없어지면 위험한 친구들 정도다. 빨래나 청소나 설거지같은 일들과 비슷하다. 문득 너무 많이 쌓이면 도망가버리고 싶지만, 사실 그 싫은 마음이 그들의 존재 목적이다. 그들은 고작 현재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일 이유는 없으며,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무시할 순 없고 일단 나타나면 무언가를 바꾸기는 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