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림팔라 Mar 19. 2019

무기력의 욕탕

[서사의 분말상자] 2018.12.16.

이제 커다란 시험도 하나 끝났고, 여유롭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탄탄한 준비를 해두었다. 재밌어보이는 게임을 할인 기간에 여섯 개 즈음 사두고, 사놓고 손도 안댄 그 많은 책들을 책장에서 꺼내고, 방전된 크레마사운드도 다시 충전하고, 오랜만에 영화보려고 빔프로젝터도 틀어보고, 기회가 되면 차차 그림도 조금씩 그려볼 계획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바쁘다. 시험이 끝났다고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었고, 바로 시작되는 또 다른 스터디와 그와 별개로 진행되는 자소서, 시험, 수업시연, 면접으로 이어지는 취업준비들. 그 와중에 살면서 처음으로 써보는 희곡을 일주일만에 만들어야 했고, 어떤 수업에서는 열띤 토론을 준비하고, 어떤 수업은 생각지도 못한 퀴즈를 보고, 하여튼 여러모로 일이 많다. 오히려 시험 전보다 더 바쁜 게 아닌가 싶은 착각도 든다.  

그러다보면 또 다시 무기력이 찾아온다. 수많은 해야할 일들에 지쳐, 결국 오늘은 사립학교 2차 시험 보는 것도 포기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제 점심 즈음부터 지금까지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안했다. 그냥 게임 좀 하다가 자고, 웹툰 보고, 영화 한 편(라이언킹이었다.)보고, 정말 그게 전부다. 지금도 사실 글을 쓸 타이밍이 아니다. 내일 당장 지금까지의 이중전공을 통틀어 가장 어려운 시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스터디 과제도 손도 안 댔고, 이제 빨리 시작해야지. 정말 이럴 때가 아닌데.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한심함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어른이 되어간다. 정확히는 내 안의 합리화를 담당하는 세포 쪽의 노련함이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커다란 시험이 끝나서 그런지,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예전처럼 아깝지 않다. '재충전'이라고 칭하기에는 그렇게 체계적이지 못하지만, 나름의 자정작용을 하는 과정으로 느껴진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몸은 어느 정도 한계를 자각했고, 주어진 시간 속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남은 일을 처리할 방법을 찾아낸다. 단순 계산으로야 내게 주어진 일을 시간에 맞추어 차근차근 나눈 뒤, 그렇게 짜맞춘 알고리즘대로 끝내는 것이 옳지만, 내 몸은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막상 쉬고 보니,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명백한 층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것은 사실은 내게 그렇게 유효하지 않았다. 그냥 흐름에 이끌려 따라왔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어떻게든 처리하고자 했다면, 분명히 처리할 수는 있었을 것임은 둘째 치고, 성격이 조금 더 망가지고,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합리화 세포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제는 내 몸이 무기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어느 정도 이해해가는 것 같다. 어떤 순간에 무기력한 시간은 오는지, 이 시간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며(필연적으로 분배한 시간보다 두 세 시간 정도 더 밀리겠지만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까지도. 주말에 한없이 목욕탕 열탕에서 늘어져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적당히 느작대다가 나오면 온 몸이 맥아리가 없지만, 자고 일어나면 또 개운하다. 좀 후진 랩가사 마냥 적어보면 이런 느낌이다.


[HOOK]
무기력의 욕탕
Just Spa like 안암랜드
저 Spotlight는 사납네
더 푹 잠겼다 나갈래


이틀 뒤면 이불 속에서 후회할 가사라서 지금 적는다. 확실히 글은 다른 밀린 일이 많을 때만 나온다. 글의 퀄리티는 보장할 수 없지만. 하여튼 이제 무기력을 마치고 샤워를 한 뒤, 새벽까지 밀린 것들을 해치워야 하겠다.
(사진은 작년 겨울에 갔던 노베하노유 온천 사진이다. 직접 찍은 건 아니고. 보니까 또 가고 싶네.)

매거진의 이전글 새 나라의 어른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