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분말상자]
집단을 벗어난 존재는 대개 넘치는 자유를 주위에 내뿜으며 여기저기 활개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과거와 비슷한 규격에 다시 스스로를 가두고자 하는 듯하다. 나의 경우는 졸업이었지만, 어떠한 종류의 사회적 변화라도 아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둘 중 어느 경우에도, 집단과 유리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전보다는 조금 더 실시간으로 관찰하게 된다. 그것은 불가항력이다. 나를 둘러싸던 물리적인 모든 소음들이 한 걸음 멀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 대체로 실없는 소리를 하며 주변의 분위기에 가속도를 붙이는 식으로 사회화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며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 그러나 막상 사람을 부르거나 모으는 일에 서투르고, 여럿이 아닌 단 둘이 이야기할 때는 거의 필연적으로 정적을 불러오는 사람이기도 하였음을 최근에 느끼고 있다. 의도하지 않고서는 사람을 만날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명백히 알게 된 사실이다. (이전에도 얼핏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자신의 민낯을, 어떠한 사회적 디딤판도 주어지지 않았을 때 드러나고야 마는 어설픈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자 하는 방어기제로서 사람은 앞선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닐까.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역사적 인물(다시 말해 죽은 사람)은 줄곧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었다. 수학 체계의 명확하고 무모순적인 기초를 완성하려다 끝내 정말 말도 안되는 정리로 인해(불완전성 정리, 쿠르트 괴델) 좌절하고 마는 그의 시도들이, 당시 무언가 '진짜 수학'을 좋아한다는 철없는 자부심으로 살았던 나에게 유독 감명깊게 느껴졌던 것이 첫 번째 이유. 그리고 그냥 수학에만 평생 빠져 살지 않고 철학도 하고 문학도 하고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고 이것 저것 다 하는 모습이 그 당시 내가 꿈꾸던 미래의 내 모습과 가장 닮아있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이것 저것 다 하기는 커녕, 그 중 하나조차 멀쩡히 해내는 게 어디 오리온 성운의 별따기인 줄을 이제서야 알아가는 지금도 약간의 로망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럼에도 사실 그의 책을 제대로 완독해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책은 한없이 어려웠고(딱 봐도 어려워 보였고) 그렇지 않은 책은 너무 염세적이라고 느껴져서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던 환상이 깨질 것만 같아서였다. 대표적인 책이 '행복의 정복(The Conquest of Happiness)'이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군인이었고, 그 때 눈에 들어왔던 문장은 아마 이런 것이었다.
'나는 종종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이러한 기분에서 벗어난 것은 어떤 철학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행동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만약 자녀에게 병이 났다고 하면, 여러분은 행복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동서문화사, 1989)
이런 글을 삶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서 가장 '어쩔 수 없는 행동의 필요'로 가득찬 시기에 읽었으니 설득력이 있을 리가 있나. 그저 '칭얼대지 말고 할 일이나 하십쇼' 하는 핀잔으로 느껴질 수 밖에.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노와 자질구레함과 치졸함의 늪에서 확실히 인생 전체가 허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듯 하다. 지금은 고생과 잡스러움만 가득하지만 '전역'이라는 문과 함께 인생의 의미를 되찾겠거니 했지.
그런데 또 이 책은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눈치 없이 이런 말을 던진다.
'언제나 미래에만 희망을 걸고, 현재에 가진 것 이외에는 모두 미래가 가져다주는 것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은 좋은 습관이 아니다. 부분 속에 가치가 없다면, 전체 속에 가치가 있을 까닭이 없다. 인생이라는 것은, 남녀 주인공들이 믿기 어려울 만큼 큰 불행을 뛰어넘어 마침내 해피엔드로 끝나는 멜로드라마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동서문화사, 1989)
그래서 책을 덮었다. 그랬다가 한 3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서 다시 펴보고 있다. 이번에는 그 때보다 설득력있게 읽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조금 더 늙어버렸나 싶기도 하다. 사실 러셀이라서 그렇지 생각해보면 조금 오래되고 조금 멋진 척을 안하는 일종의 '자기계발서'임에도, '자기계발서' 분야 자체를 적극적으로 꺼려하는 내게 크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 그 땐 염세적이거나 반대로 꼰대처럼 느껴졌던 문장이 이젠 또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삶에 '활기'를 잃었기 때문일 것 같다. 요즈음은 도무지 그렇게 적극적으로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죽지 않은 채 있다'에 조금 더 가깝다. 아마 이 책을 다 읽어도 행복을 정복하기는 커녕, 행복의 의미도 되찾기 어려울 것이고, 내 마음이나 행동도 한 뼘도 바뀌리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활기를 잃은 사람에게만 공명하는 문장들도 있다는 생각은 꽤나 나를 고무적이게 만든다. 잠시나마.
그리고 대부분의 글은 정말 이럴 때나 써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