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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팔라 Apr 11. 2019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오르는 사람들

서사의 분말상자

오늘은 조금은 평범하고 뻔한 푸념의 글이 될 것 같다.

흔한 인생론, 흔한 칭얼거림에 불과할 수 있으니 만약 그러한 것들에 넌덜머리가 난다면 미리 글을 넘기는 게 유효할 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는 날이었다.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대에 배차간격이 긴 지하철을 타다 보니 계단과 에스컬레이터에 인파가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를까 했지만, 오히려 같은 꾀로 계단을 오르고자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관계로 꾸역꾸역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문득 떠올랐다. 산다는 건 뭔가 에스컬레이터 같은걸까?


옛 사람들은 인생을 등산에 참 많이도 비유했다. 개인적으로는 윤종신의 ‘오르막길’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위안도 많이 받았더랬다.

조금 찾아보니, 셰익스피어 왈, ‘단단히 마음먹고 떠난 사람들은 모두 산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다. 산은 올라가는 사람에게만 정복된다.’ 하였고,

(누군지 모르지만) 해럴드 V.멜처트라는 사람은 ‘하루하루를 산에 오르는 것처럼 살아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등반하되 지나치는 순간순간의 경치를 감상하라. 그러면 어느 순간 산 정상에 올라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며, 그 곳에서 인생 여정 중 최고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라며 노력과 풍류를 강조하기도 했다.


솔직히 둘 다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개인의 마음먹기로 바뀌지 않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며,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오른다고 정상에 도달한다고도 보증할 수 없다.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정상의 존재 여부 그 자체에 의한 문제다.)

왜인고 생각해보니, 더 이상 ‘산행'은 인생을 설명하기에 그다지 적절한 모델이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새롭게 제시하는 모델은 ‘역방향 에스컬레이터’ 모델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꾸로 된 방향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시대. 지금은 그런 느낌의 세상이지 않나?

뭣 모르는 어른들이 ‘우리 때는 계단도 없는 첩첩산중을 맨몸으로 걸어다녔는데, 요즘 애들은 손잡이도 있고 걷기 편하게 층층이 파여진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도 고마운 줄을 몰라요!' 한다는 점까지도 비슷하다.


‘역방향 에스컬레이터’ 모델이 ‘산행 모델'과 구분되는 측면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첫째는 박탈감의 문제이다.


어느 시대에나 태어날 때부터 꼭대기 근처에서 태어나는 종자들은 존재하였으나, 산은 기본적으로는 정직하다.

즉, 개인의 배경에 따라, 정상에서 얼마나 가까운 지점에서 출발하는가, 산행로가 얼마나 가파른가, 중간에 얼음물을 파는 슈퍼가 있는가와 같은 조건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현재 지점에서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운동 에너지를 소비하여 위치 에너지를 획득하는 그 일련의 소모 과정은 자신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는 점, 최소한 그 공통의 규칙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었다.


지금은 좀 다르다.

에스컬레이터는 정방향과 역방향이 맞붙어 있는 구조이기에, 간신히 힘을 짜내서 걸어내야 기존의 위치에서 하락하지 않는 끝없는 노동을 하다가도, 잠시 옆을 쳐다보면 정방향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에어팟을 끼며 흥얼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깝기 때문에 너무 잘 보인다.

(굳이 풀어서 말하기 싫지만 SNS며 뉴우-미디어 따위를 통해 우리는 너무 많은 인간 군상의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에 대한 나름의 비유이다. 허허.)


더 이상 공통의 규칙은 없으며, 옆에 지나가는 저 놈들은 나처럼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높은 곳에 올라가 있다. 토익이 몇점이고, 면접이 어떻고, 시험이 어렵구, 인적성이 어쩌구, 자격증이 몇 개고, 뭐 이런건 고민해본 적도, 고민할 필요도 없어보이는 사람들이 이미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상대적 박탈감. 처음 길을 오를 때 역방향 에스컬레이터로 밀려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불법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넘어서 정방향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거나, 아니면 언젠가 잠시 에스컬레이터가 끊기고 다시 두 방향의 에스컬레이터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끝없이 걷는 것.

이미 내 뒤에도 사람이 너무나 많기에, 잠시 정지하여 역방향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맡겼다가 정방향 에스컬레이터로 갈아타겠다는 전략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너무 큰 민폐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욱 더 커다란 박탈감이 우리를 집어삼킨다.


두 번째는 죄책감의 문제이다.


산행 중의 휴식은 죄가 되지 않았다. 쉼 없이 산을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며, 산행 중 잠시 휴식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재충전의 과정이요, 삶의 참된 의미를 탐색하는 멋들어지는 순간이요, 소중한 산행의 동반자를 만나는 교차의 순간이 되기도 하였더랬다.


그러나 역방향 에스컬레이터에서의 정지는 여러모로 죄스럽다.


먼저는 내가 정지해있다는 사실만으로 추락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점이 죄스럽다.

이번 주에 가벼운 학원 알바를 시작했는데, 가보니 학생들 대부분이 초등학생이고 몇 명만 겨우 중학교 1,2학년들이다.

마음 같아선 놀고 싶어할 때 좀 놀게 내버려두고도 싶고, 수학도 차근차근 설명해주고도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어렵다.

원래 1월 쯤에 학원을 개원했으면 벌써 선행으로 개념 한 바퀴를 돌리고 지금 복습을 해야 하는데, 건물 공사 때문에 학원이 늦게 개원했기 때문에 지금 고작 두 세 단원 밖에 선행을 못 나갔고,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서 다른 학원 다니는 학생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원장님의 전언이 있었으므로.

제 때 배울 것을 약간 빠르게 나아가고 있어도 뒤쳐지는 것으로 파악되는 세계다.

하물며 그마저도 멈춰버린다면 대체 얼마나 ‘뒤쳐진’ 존재라고 인식되는 것일까.

고작 살면서 시험 한 번 떨어지고도 이렇게 멈춰선 것만 같은 나인데. 누구라고 다를까.


게다가 내 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점 역시 죄스럽긴 마찬가지다.

학원에서 애들끼리 떠들고 있으면, 당연히 ‘다른 학생들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되니까 조용히 하고 문제 풀어요!’ 외치고는 있지만,

…솔직히 그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많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역방향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저 걷는 것이 진짜로 재밌거나, 건강을 위해서 목적지와 상관없이 열심히 걷는 사람들도 분명 있긴 있겠지.

하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원할 때 멈춰설 수도 없는 걷기에서 영원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거의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멈춰서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멈춰버리면, 내 주변의 많은 동료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고,

또 내 뒤를 묵묵히 걸어주던 소중한 사람들을 실망시킬 것이며,

내 앞에서 길을 밝혀주던 누군가가 나를 걱정할텐데.

이러한 종류의 착한 마음들이 뚜렷한 죄책감으로 축적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차마 멈춰설 수는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끝없이 걸어도, 어느 순간 주변의 다른 사람의 속도를 맞추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같은 종류의 죄책감은 분명히 온다. 경우에 따라 멈춰버리는 것보다도 더 크게 올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막막함의 수준이 다르다.

아무리 높은 산도 멀리서 보면 어쨌든 정상은 있다. 정상까지의 거리도 삼각형의 닮음과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활용하면 대충 알 수 있다.

정상은 움직이지 않으며(풍화작용에 의해 약간 움직일 순 있지만 그 경우는 조금이나마 높이가 낮아지니까 사실 이득이다.) 다만 내 두 다리도 움직이지 못할 경우를 두려워하면 된다.


역방향 에스컬레이터는?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목적지까지의 거리)/{(나의 걸음속도)-(에스컬레이터의 속도)}>(내 남은 수명)이면 평생 걸어도 목적지에는 수학적으로 도달할 수 없다. (물론 걸음 속도가 에스컬레이터보다 빠르고 두 속도의 차가 항상 일정하다는 가정 하에 나오는 식이고, 사실 그럴 리 없으니까 적분을 하던가 해야겠지만, 그건 아마 나도 당신도 원하지 않을 것 같다.)

에스컬레이터의 속도는 내가 정할 수 없으므로, 또 앞사람 머리에 가려서 목적지가 어딘지도 잘 보이지 않으므로,

열심히 걸어도 ‘사는 동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거야’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섣불리 포기하기도 애매하다. 어차피 멈춰설 수는 없는 트랙이기도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막막하게 걸어나서는 수 밖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

가끔 운 좋게 Lotto라고 쓰여있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도 있긴 한데, 아무래도 그게 나는 아닐 것 같고.


아무튼 누구라도 삶에 대한 어줍짢은 훈계를 듣거나 가끔 거기에 설득되어 자신을 책망하고 싶어진다면,

역방향 에스컬레이터를 한번쯤 떠올려보면서 조금이나마 주변 환경을 탓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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