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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팔라 Mar 25. 2019

최대정지마찰력

[서사의 분말상자]

늦은 밤. 이어폰을 꽂은 채 버스를 탄다. 오랜만에 컴백한 좋아하던 가수가 엄마에게 용돈 좀 보내달라고 노래를 부른다. 재밌네. 슬쩍 미소지으며 차창을 들여다보니 이상하다. 바깥 풍경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버스는 정류장에 멈추어 있었다. 딱히 야밤에 지켜야 할 시간 약속이나 통금시간 같은 게 있지는 않아서 바로 짜증이 치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계속되는 멈춤에 가슴이 답답해올 때쯤 버스는 다시 움직였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멈춰있는 버스에서 짜증이 샘솟기 시작하는 시점은 언제쯤일까? 버스가 멈춰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그 순간일까, 아니면 정지한 버스 때문에 이후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하는 순간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 중간의 어디쯤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스스로 내놓은 대답은 이렇다.

정지로 인한 답답함은 아마도, 멈춰있는 이 시간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상태’라고 느껴지는 순간에 시작된다는 것.

아마 내가 운동 목적으로 마라톤을 뛰는 상황이었다면, 노래 한 곡이 흘러가는 시간 동안, 힘이 들어 잠시 멈춰있다고 해서 답답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충분히 많이 뛰었고, 잠깐 쉬어야 다시 또 달릴 수 있으니까. 다시, 또 달릴 걸 알고 있으니까. 내가 결정한 정지상태니까. 하지만 또, 만약 밤이 늦어 집으로 돌아갈 다른 대중교통은 없고, 힘도 쓸 만큼 써서 또 달릴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이라면 답답할 게 분명하다. 정지해있는 지금 이 시간이 더 이상 잠깐 쉬어가는 이벤트가 아니라, 힘을 써서 바꾸어야만 하는 ‘상태’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멈춰있는 상태는 다른 상태보다 안정적이다. 쉽사리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최대정지마찰력은 운동마찰력보다 크다.


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충분히 배웠다. 정지 상태의 물체를 움직이는 데에 드는 힘은, 그 물체가 움직일 때 방해꾼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양보다 더 크다는 것을. (최대정지마찰력에 대한 글을 이전에 썼던 것도 같지만 기억이 잘 안 난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마도 운동마찰력 정도의 힘은 충분히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의 자신감으로는 약간 부족하다. 일단 정지 상태, 고착 또는 교착 상태에 빠져버렸다고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조금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멈춰있다는 생각이 더 이상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라고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심리적 마찰력이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요 며칠 여기저기 술자리와 밥자리를 돌아다니며 많은 달려가는 사람들과 멈춰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또 지하철에서 수많은 인간 군상을 보았고, 우연히 예전에 알던 사람도 만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봤다. 생각보다 나처럼 멈춰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다시 잘 움직이는 사람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정지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방법은 지금의 멈춤이 일시적이고 자의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속담으로 치면, 넘어진 김에 별구경한다는 느낌으로. 정지 상태를 기나긴 삶의 잠깐의 이벤트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 마찰력이 커지는 그 순간을 늦추어줄 수 있지만, 실세계의 정지 상태가 길어지면 어쩔 수 없이 자기기만으로 느껴지는 경향이 있어서 오래 멈추게 될 경우에는 효용이 적다. 두 번째 방법은 어떻게든 일단 어디선가 에너지를 최대한 뽑아서 정지상태를 탈출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 이상의 에너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동하는 것과의 접촉이 필요하다. 새로운 취미를 가지거나, 운동을 시작하거나, 무슨 강연이라도 듣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가진 것 이상의 힘을 잠시 차용해서 쓰고,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는 이젠 알아서 달려갈 수 있을 거라 믿어보는 것이다. 여유가 된다면 멈춰있는 다른 물체들에게 고기도 좀 사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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