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림팔라 Feb 26. 2020

사공초기수 #0. 1월, 프롤로그.

임용 1차 탈락부터 학교 합격문자까지

이럴 리가 없었다. 분명 올해에는 붙을 것이 분명해보였던 중등교사임용시험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시험은 지나치게 쉬웠고 실제로 시험장을 나올때 예상했던 점수는 훨씬 높았는데,

이거 실수하고 저거 실수하고 이건 대체 왜 잘못 쓴거야? 하다보니 결국 최종 성적은 1차 커트라인에서 0.01점 낮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지만 사실 이 0.01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오차보정 점수이다. 이론상 커트랑 완벽히 같은 점수임에도 분수를 소수로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한 반올림 따위에 의해 표기상만 다르게 나온 점수.) 점수를 받았고, 너무나도 어이없게 한 해가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신이 있다면 그는 아마 내 커리어를 고양이용 장난감(잡힐랑 말랑 약올리는 그거)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다방면의 공격을 통해(시험장에서 감독관이 도장을 결시란에 찍는 등...뭐 일이 많았다.) 이런 아슬아슬한 탈락을 굳이 경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종교관이나 수학적으로 옳게 된 점수 계산 따위는 관계 없이 아무튼 임용은 또 탈락했고, 지긋지긋한 이 짓을 또 해야한다는 것만이 현실이었다. (임용 위탁 사립도 넣었었는데, 거긴 아예 공립지원자는 안 뽑고 끝낸 것 같더라.)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멈춰있기는 싫었다.


떨어진 날 술 마시고 다음날부터 기간제 원서를 잡히는 대로 넣었다. 작년에 2차 시험 끝자락에서 떨어지고 최상의 조건(1학기 근무(2학기엔 임용준비하려구), 집 근처(대중교통 극혐), 온라인 지원(집에서 나가기 귀찮음))만 골라서 넣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면허는 없어서) 대중교통으로 3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넣었다. 서울, 경기, 인천. 한 학기, 일 년. 온라인, 우편 지원. (아 그래, 솔직히 학교 방문 지원은 안했다. 아무리 그래도 집에서 거기까지 나가긴 귀찮았어.) 상황과 조건 따지지 않고 모조리 지원!...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한 3일은 그렇게 했다. 20여 개 학교에 지원을 넣었다. (나중에 보니 그 중 7개였나 9개에서는 1차 합격 문자가 왔다. 학원 경력 빼고 변변한 경력도 없는데 뽑힌 걸 보면, 살면서 처음으로 그놈의 학력을 써먹은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첫 날 우편으로 지원서를 보낸 학교에서 이틀 뒤 바로 면접과 수업 실연을 보러오라는 문자가 왔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러 갔다. 학교는 1년 근무 조건의 사립 공고였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첫 사립 면접이었기에,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무래도 '공고'라는 이름이 주는 편견이 나에게도 조금은 있었기에, 이 학교는 '그냥 경험삼아' 보러 가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솔직히 가는 길도 아주 짜증의 연속이었다. 대중 교통 2시간 반 정도의 애매한 거리. 그마저 버스들이 정차도 안하고 휙휙 나를 무시하는 통에, 예상 도착시간보다 1시간은 빨리 출발했음에도, 몇번이나 다른 경로를 찾고 버스 잡으려 양복입고 뛰어다니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야 아슬아슬하게 지각하지 않는 선에서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솔직히 진짜 그냥 가지말까? 하는 고민을 3번은 했다. (올해 말에 이 순간을 뒤돌아보며 'Stay...!'할까봐 좀 두렵긴 하다.)


그런데 학교가 너무 예뻤다. 정확히는 학교 가는 길의 성곽이 예뻤다.(이를 통해 대충 어디 쯤의 학교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주변에서 살면 진짜 좋긴 하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재작년에 교토를 놀러갔었는데, 숙소 주변 강가의 모습이 이 곳과 꼭 닮아있었다. 이 곳에 약간 꿈꿔오던 생활공간의 모습이 있었다.


수업 실연을 먼저 하고 그 후 면접을 보는 방식이었다. 대기실에는 한 2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때도 솔직히 기대는 안했다. (솔직히 처음엔 같은 지원자가 아니라 심사하는 선생님들이 섞여있는 줄 알았다. 그만큼 경력자가 많아 보였다.) 그런데 다행히 여러 과목 선생님이 섞여있는 것이었고, 수학 지원자는 5명이었다. 흠...5명이라. 쉽지는 않겠는데. 하다가 수업 실연을 들어갔다. 주제는 고1 수학 '나머지정리' 단원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임용 2차 실연을 준비했다보니 거의 비슷한 스타일로 수업을 진행했다. 다만 유머를 좀 섞었다. '선생님이 지난 시간에 다항식의 나눗셈을 가르치면서 여러분의 통곡소리를 들었어요~' 뭐 이런 식이었다. (큰 기대를 안했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면접만 남았는데, 이게 웬걸, 수학을 2명 뽑는 거였다. (사실 당연히 알고 있었어야 되는 정본데, 귀찮아서 확인도 안하고 왔다.)오? 40%면 그래도 조금 가능성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첫 사립 면접은 멘붕 그 자체였다. 그 동안 내가 준비했던 면접이란, '배움 중심 수업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교사로서 어떠한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나 '다음의 두 학생 중 한 학생을 선택하여 선택한 이유를 말하고, 진로 지도를 진행하는 상황을 가정하여 상담해보세요.'같은 뭐랄까 학문적인 면접이었다. 그러나 이건 전혀 달랐다. 진짜 많이 달랐다. 일단 다대다 면접이었다. 교장,교감, 각종 부장선생님들과 지원자 5명이 교장실에서 모두 모여있었다. 첫 질문부터 막혔다. 1분 자기소개. 어쩌면 다들 삶에 그렇게 드라마가 많을까. 누구는 10년간 골프를 치다가 새로운 꿈을 찾게 되었고, 누구는 유명 명문고에서 몇년동안 근무를 했고, 누구는 대학원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참 다들 내세울 것도 많고 전달방식도 명확했다. 그에 비해 나는, 정말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다른 지원자가 보기에 쟨 떨어졌다 싶을 정도로 소개했던 것 같다. 다른 질문들도 어려웠다.


'아무 경력도 없으신데 학교생활을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 '아...그 학원 경력이 있긴 한데, 제가 공부 안하려는 애들을 가르쳐보는게 꿈이었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 한 마디 때문에 약간 학원에서 무슨 8학군 애들 전문으로 가르치는 잔뼈가 굵은 전문가같은 이미지가 순식간에 생겨버렸다.)


'학원 일 하다 오셨으면 만족하지 못하실텐데....' - '어...어떤 부분이요..? -'페이가....' -'아...아닙니다...원래도 그렇게 많이 받지는..;;;' (뭔가 오해를 제대로 하신 거 같다. 아니 저 대학생 때 학원 근무 9개월한 거 빼면, 집근처 학원 3개월이 전분데...)



'우리 학교는 직업계 고등학교이다 보니 학생들을 다른 기업체와 연결해주는 약간 '영업'같은 업무도 해야 합니다.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 '아...? 아...예...해보겠습니다.'(내가 속한 부서에서 결과적으로 이 일도 전담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설마 진짜 이 상황까지 고려하고 한 질문은 아니겠지?)


'우리 학교는 퇴근시간이 없는 학교로 유명합니다. 어떻게 그래도 괜찮으세요?' -'(아니 그건좀...)....' 하고 있는데 옆에서 뭔 '물론입니다! 학교에 분골쇄신하겠습니다!!!!'이렇게 분위기를 몰고 가서 그냥 따라갔다. (이건 분명한 복선이었다. 야근 인정 시간이 한정되어있는 줄은 그땐 몰랐지..)


압권인 질문은 '전교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였다.

솔직히 잘 모른다. 전교조와 교총 사이의 그 뜨겁고도 무거운 갈등관계...생각해본 적 없다. 그런데 약간 모범답안은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였나보다. 아무래도 회사 사장이 노조를 반기지 않는 것과 유사한 이유인 듯 하다.

나는 세 번째 자리였고, 앞선 두 사람은 열띤 비판을 보였다. 방향성이 잘못되었고 갈등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

나는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솔직히 말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tv나 여기저기서 여러 이야기를 들어는 봤지만, 그것과 실제로 교사가 되었을 때에 느끼게 될 생각은 아마 다를 것 같아서 정확히 얘기를 못 드리겠습니다. 뭐 앞선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방향성에 의구심이 들기는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보다는 어벙벙댔다.)

그렇게 다섯 명의 답변이 끝나니 교장 선생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다들 좋지 않게 생각하시네요..? 그런데 제가 전교조인데...ㅎㅎ'


지원자들은 다들 웃었지만 그 이빨 속에 감춰진 'X됐다'라는 진심은 감춰지지 않는 듯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그 면접에서 유일하게 +가 될 요소가 있었다면 그 순간 뿐이었다. (내가 +가 아니라 나머지 모두가 -된 거겠지 사실.) 그 외에는 모두 엉망.


그리고 이틀 뒤, 최종합격 문자가 왔다. 그 날부터 더 이상의 지원서를 넣지 않았다. 미리 지원했던 여러 학교에서 1차 합격 연락도 왔지만 가지 않았다. (.....가볼 걸 그랬나?) 아주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 정리해보면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교감 선생님이 면접 때 '설마 여기 붙으시고 다른 학교 가시고 그러는 건 아니시죠? 저번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서 엄청 고생했습니다..ㅎㅎ' 하셨는데 그 때 수긍했다는 점.

-의외로 이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사실 나의 안위를 좀 더 신경써서 챙겨야 하는 건데 아직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이 꽤 컸다. 순진했지.


2. 쉬고 싶었다. 다 집어치우고 놀고 싶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1월 한달 내내 게임만 했다. 술도 가끔 먹고 스키도 한번 타러 갔지만 기본적으로 히키코모리처럼 방에 처박혀있었다. 당장의 탈출 욕망으로 집히는 대로 직업을 구했지만, 아무래도 탈락의 아픔이나 1년동안 쌓인 피로를 풀 시간은 필요했다.


3.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양한 삶의 모습을 겪어보고 싶었다.

-왜, 어느 마라톤 선수가 넘어진 김에 경치를 처음 구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어차피 임용은 떨어진 거, 붙고 나서 하기 어려운 경험을 많이 해보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나중에 '공립 인문계 정교사'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 그 반대인 '사립 직업계 기간제교사'를 해보면 (교사라는 직업 내에서) 가장 다른 경험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 그리고 앞서 말한 성곽과 어우러진 이 마을의 정취도 역시 쉽게 경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큐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립 공고 초임 기간제 수학교사( 이하 '사공초기수')로서의 삶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