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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시 Jun 14. 2024

밝혀버린 프러포즈

“그래도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왕자님의 울음보가 터졌다.


 외가식구의 환갑잔치에 다녀오고 난 날이었다. 그는 운전을 해서 부모님을 모셔다 드리고 집에 와야 했기에

혼자 멀뚱한 정신으로 자리를 지켰고, 술에 익어가는 외가 식구들을 빤히 보다가 많은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왕자님의 어린 시절은 장사하는 부모님 대신 할머니와 외가 식구들 손에  오가며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외가 식구에 대한 애정이 큰 것 같았다.

이제는 다 큰 조카들과 술잔을 나누며 웃고 떠드는 모습이 즐겁다가도 신기했고, 가만히 가족들의 얼굴을 뜯어보며

어릴 적에 검고 풍성한 머리숱이 흰머리가 가득해지고, 웃고 있는 얼굴에 늘어난 주름과 줄어든 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앞에서 눈물이 차오르는 걸 간신히 참다가 나를 보고 울음이 터진 것이다.

이렇게 여리고 착한 왕자님을 어떻게 키워 나가야 할지. 잠들려고 누웠다가 울음이 터진 왕자님을 데리고 나와 하이볼을 먹이고 얘기를 들어줬으나,

왕자님의 감정은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 또한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기에 그의 감정이 충분히 공감 갔다. 왕자님의 식구들보다 우리 식구들의 연령대가 높았다.

이미 부모님끼리의 나이 차이도 거의 8살 정도가 난다.

부모님이 60대 중반이고 내가 30살이 조금 넘었을 때, 나는 서울로 독립을 했다. 몇 달을 정신없이 혼자살이에 버둥대다가

오랜만에 본가에 돌아가 마주한 부모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진 적이 있었다.

매일 보던 부모님의 얼굴은 나이가 드는 줄 몰랐는데, 독립을 하고 몇 달 만에 본 부모님은 한순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있었다.

기분 탓인 게 제일 클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 기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었다. 한창을 슬퍼했다.

(지금도 부모님과 식구들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 서글프다.)

 하지만 우리 가족, 아빠, 엄마, 언니, 나는 개개인의 행복의 부류를 찾아 열심히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다시 뭉쳐서 웃고 떠들며 추억을 같이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그리고 왕자님의 가족들도 그런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거라며 그를 달랬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에게 “자식”의 포지션으로서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해드리자고 말했다.

그리고 어렵겠지만, 속에만 담아두고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하는 감정을 부모님과 식구들에게 보여드리라고 했다.

연인 관계에서도 사랑한다 안 하면 모르듯이 가족관계에서도 사랑한다 표현하지 못하면 알지만,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니 느끼게 해 드리라고 했다.

무겁게 끄덕이는 왕자님의 얼굴을 보다가… 나는 비장하게 말했다.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까? 진짜 보여주기 싫고 나중에 다 완성되면 보여주고 싶었는데…

  하도 우니까 보여주는 거야. 이것밖엔 나도 표현할 게 없을 거 같아서.”


그러고 왕자님에게 13화까지 완성된 “마전동 왕자님과 결혼하기”를 보여줬다.

어린애한테 사탕을 물리기라도 한 듯이, 왕자님은 어느 순간부터 자기 얘기에 깔깔 웃기도 하고 소리 내서 읽기도 했다.

(마치 우리 조카가 7살 재롱잔치 동영상을 보고 반응하는 것과 비슷했다.)


“맨날 일 끝나고 책 읽는다고 하더니, 이거였구나. 나중에 인쇄해서 책으로 만들어주면 더 감동이겠다. “


 역시 왕자님은 착하게 사람을 볶는 재주가 있다.

어쨌든, 왕자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온전한 슬픔을 같이 닦아줄 당신의 편이 생겼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지원자가 생겼으니,

흘러갈 수밖에 없는 세월에 슬퍼하지 말고 그 순간을 진심을 다해 행복해하고, 즐거움을 찾자.

그래서 돌아서봤을 때 “우리 후회 없이 잘 살았다.”라고 입 맞출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자.


울지 마, 왕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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