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글감을 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적성에 맞는 나의 일을 가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릴 때 나름대로 적성에 맞는 것이 그림 그리는 것이고 공부에만 매달리는 애들이랑은 다른 나만의 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미술과 관련된 상은 싹쓰리하고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를 나갔을 때 나는 미술천재인 줄 알았다. 고3 까지도 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서울대학교 미술과> 입학을 바라며 고시원에서 학원을 다니며 입시를 전전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해 학교를 모두 불합격했다. 수능도 믿었던 국어를 망치면서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집 옆 대학교도 못 갈지경이 되었다.
엄마한테 재수를 하겠다고 졸라댔지만 엄마는 단호하게 학교를 가지 말고 공무원 시험을 치라고 말했다. 살아보니 그게 안정된 길이란다. 그 당시 엄마가 매우 미웠다. 누구나 불합격할 수 있는 것인데, 내가 하겠다는데도. 누구나 당연히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학교를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아주 충격적이었다. 더군다나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적성을 찾아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라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공무원 시험을 치라는 뚱딴지같은 소리에 더 어이가 없었다. 재수를 하더라도 또 대학에 떨어지면 공무원 시험을 친다는 서약서를 받아가는 엄마가 밉기도 하고 정말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 말을 모두 믿으면 안 된다는 걸 그때 또 한 번 느꼈다.
나는 재수를 하면서 “불합격”을 또 배웠다.
수많은 불합격을 맞아보면서 불합격에 무뎌지고 상처 받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배웠다.
이번해 임용도 불합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나도 슬프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다. 다만 나와 함께 졸업하는 남자 선배가 유일하게 1차 합격을 하여 배가 조금 아플 뿐이다.
1년 동안 조금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도 아픈 몸뚱이로 수술과 거북목 경직 외 잔병치레를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시험장에 가서 꿋꿋하게 시험을 친 나 자신이 오히려 기특하기까지 하다. 내가 몸만 건강했으면 깡다구 있게 붙어 볼만 했지만 올해는 참았다. 내 몸을 내가 잘 알기 때문에 페이스 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년의 키워드는 <합격>이다. 더 이상의 불합격은 나에게 의미가 없다. 하늘은 다른 사람에게 불합격으로 동기를 자극하고 그 사람을 자극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이제 불합격에 흔들리는 내가 아니다. 불합격이라고 좌절할 필요 없다. 불만 빼면 합격이 된다. 불은 아니다 라는 뜻이다. 아닌 것은 맞게 만들면 된다. 다행히도 나는 합격할 방법을 알고 있고 내 페이스 조절을 잘한다면 이번 해는 불을 빼고 합격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
내년에는 아이들의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다. 어릴 때 되고 싶었던 멋진 작품을 그리는 화가는 아니더라도, 세상과 조금 타협한 직업이라도, 나의 꽤 괜찮은 직업을 갖으며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리는 엄마 아빠 품에서 벗어나고 싶다. 가족을 서포트해줄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
불합격에서 불뻬기, 나의 올해 키워드는 합격이다.
21년 기숙사 신청을 했다. 기숙사 점수가 낮아서 원하던 5동에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기숙사 5동은 신축시설로 경쟁률이 높은 곳이다. 그래서 몇 번이고 기숙사 지원현황을 살펴봤다. 신청서 작성 및 확인, 지원현황, 생활관 모집 공고. 내가 신청한 내용보다 기숙사 신청현황만 죽도록 확인했다.
앗... 급하게 누르던 손가락이 목표를 잘못짚었다. 내가 작성한 신청서가 떴고 내가 지원한 동에는 4동이 표시되어있었다. 다시 봐도 5동이 아니라 4동이 분명했다. 이전에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작년 2학기, 두 번의 비대면 시험을 치르는 시간에 시간의 길이를 잘못 알았다. 시험 공지를 대충 읽는 바람에 1시간 동안 칠 수 있는 시험을 나 혼자 30분 만에 풀었다. 1차 시험 때,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대학 친구가 없는 바람에 나의 오해를 풀어줄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겨우 대면으로 친해진 친구로부터 시험 시간은 1시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미 모든 시험이 끝난 후였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습관은 나에게 엄청난 핸디캡을 줬다.
내 마음을 확인하지 않는 습관은 가족들에게 상처도 줬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상처 줄 기회가 많다는 것과 같다. 지난해를 돌이켜 보면 특히 가족들에게 짜증과 심술을 많이 냈다. 언니에게, 엄마에게, 아빠에게 일단 짜증은 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 나면 ‘왜 그랬지, 어른인데 그럼 안되지.’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2021년 나의 키워드는 ‘확인’이다. Do의 이전과 이후에는 Check(확인)과 Exactly check(정확히 확인)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Do(한다)에만 집중해 살아왔다. 올해는 확인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족들에게 주는 상처와 나에게 주는 핸디캡을 없앨 것이다. 내 마음을 먼저 확인하고 봤던 내용을 정확히 확인하는 행동은 성숙한 어른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실수를 줄이는 가장 쉬운 방법, 나의 키워드는 확인이다.
완경이란 폐경의 또 다른 말이다. 폐경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 즉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네이버 사전에 나온다. 그러나 닫혔다는 것과 완성했다는 것의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닫혔다는 폐경은 폐쇄, 폐업, 폐지 등과 같이 몰락, 소멸의 의미를 내포한다. 부정적인 어감이다.
50대 초중반이면 아직 살아갈 날이 30년은 족히 남은 온전한 사람으로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이다. 때문에 폐경이란 말보다 완경이라는 말이 통용되기를 원한다. 김훈의 소설 <언니의 폐경>에서 월경을 썰물과 밀물로 비유하지만 아쉽게도 김훈 또한 폐경을 쓸쓸하고 가부장적인 어조로 그래 낸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의 완경>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욕심이기도 하다.
완경이라 말하자. 떠벌리지는 않더라도 부끄러워하지는 말자. 나이에 걸맞게 몸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며 원래의 목적을 모두 달성한 것이다. 알다시피 여성의 난포는 유전적으로 그 개수를 갖고 태어나며 본인에게 주어진 난포를 그동안 성실히 만들어 낸 것이므로 몸의 섭리를 잘 이행한 것. 사춘기 월경은 호르몬의 입학이고 갱년기의 완경은 졸업일 뿐이다. 호르몬 졸업은 남자도 마찬가지라 남자에게도 갱년기는 있다. 여자보다 심한 갱년기를 앓는 남자도 보았다. 사람에게 갱년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남은 삶을 한번 되짚어 보라는 성찰의 시간이 아닐는지. 나는 그렇게 짐작한다.
완경도 삶의 한 과정일 뿐이지만 조금만 기력이 달리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평소 추위를 잘 타는 편이지만 어느새 온몸에 땀이 흥건하게 고이기도 한다. 친구의 경우는 공황장애가 오거나 불면증으로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도 있다. 몸이 리셋된다. 완경기는 왕성함, 몸이 받는 가중을 줄이라는 뜻이다.
완경은 동적인 에너지를 아껴 쓰라는 의미다. 몸이 덜 상하게 해야 한다. 동적인 에너지가 정적으로 이동한다. yes냐 no의 대답 속에서 maybe도 포함시킬 줄 아는 신중함이 베여든다. 사람들은 간혹 이것을 성숙이라 하지만 나는 신중함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까불대지 않고 다방면의 좌표를 생각할 수 있는 어른스러움.....
부드러운 완경기를 맞고 싶다. 부드러운 것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모든 영역을 말한다. 삶의 파고를 지나온 안온한 여유,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베풂, 익숙함에 물들지 않는 창조적인 시각, 현재에 만족할 줄 아는 비움. 생활의 몰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취미. 이런 것들을 갖추는 것이 나의 부드러움이다. 부드러움은 편안하다. 나와 타인과 세상에.
부드러운 완경, 올해 나의 키워드다.
부드럽다는 성질이나 태도가 억세지
아니하고 매우 따뜻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