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글감입니다
부모로 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정신적 독립과 경제적 독립. 경제적 독립의 다른 말은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 조건을 비춰보면 아직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 20살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했다.
첫 알바에서는 무참히 잘렸다. 코로나 속에서 다음 알바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계속되는 낙방에 지쳤고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고 무서웠다. 한창 웅크리고 있을 때, 친구가 나에게 추석 단기 알바를 소개했다. 추석 단기 알바는 참치와 햄 선물 세트를 판매하는 일이었다. 혼자서 택배도 보내고 손님도 대해야 하기에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뭐든 해보자는 절실한 마음으로 단기 알바를 수락했다.
첫날에는 긴장을 많이 했다. 한번 알려준 길은 복잡해서 외우기가 힘들었고 참치 박스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손님 앞에서 목소리도 작게 나왔다. 그때 파트장님이 전화가 와서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다른 알바생들도 많은데 왜 나만 따로 부르는지 의아해하면서 사무실로 갔다. 파트장님은 나를 앉혀두고 이것저것 물어봤다. 택배를 붙이는 방법, 오늘 나갈 물량 등등.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내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자 내 업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냈다. 내가 보는 앞에서. 통화를 마치고 모르는 일은 물어보라며 나를 내보냈다.
얼떨떨했다. 알고 보니 다른 알바생들은 나보다 2살에서 7살까지 나이가 많았다. 20살짜리 초짜 알바생이 혹여나 사고라도 칠까 싶어 미리 쉘드를 치고 찔러본 것이다. 이해가 되면서도 자존심이 은근 상했다. 사고는 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바짝 긴장했다. 제품에 대해 공부했다. 참치가 몸에 어떻게 좋은지, 생산과정이 어떤지. 추석 특판이 왜 좋은지 비교해 설명했다. 어려 보여서 그랬는지 주문이 많았다. 택배 사고도 없었다.
알바 마지막 날, 청정원을 담당하던 이모가 나에게 일을 잘한다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또 다른 이모는 다음 설에도 알바를 하러 오라며 연락처를 물어봤다. 웅크러져 있던 자존감이 단비를 맞은 꽃처럼 고개를 들었다. 참치는 무거워서 단기알바생들이 싫어하는 제품이었다. 초짜인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알바를 하면서 새벽에 집을 나서는 아빠를 떠올렸다. 아빠는 이렇게 돈을 벌었겠지. 아침을 회사에서 먹고 점심을 또 회사에서 먹고 해가 져야 집으로 들어오는 시간을 맡기고 돈을 벌었구나. 아빠의 시간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아빠 잔소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알바는 아빠에 비하면 정말 가벼운 것이었다.
20살인 나에게 돈을 버는 것이란 홀로서기다. 언제까지 부모님 등에 업혀 살 수 없기에 스스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직도 돈을 번다는 것은 무섭고 두렵다. 부모님 등이 아닌 옆에, 당당히 서기 위해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이 나의 숙제다. 설날의 단기 알바를 또 기다리며 돈은 홀로서기를 증빙하는 첫 시작이 될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돈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초등학생 때부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발견해낸 것이 중고마켓이었고 중고마켓으로 집에 있는 물건을 팔았다. 그 와중에도 스티커를 제작해 천 원씩 팔아서 돈을 모았다.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졌다. 그때까지는 푼돈이었다.
진짜 돈을 번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별로인 대학에 수시로 붙어버려서 그런지 남들보다 수험생활을 일찍 털어내고 돈을 벌 생각에 알바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알바 자리를 수없이 찾고 시간이 맞는 곳에 이력서를 들고 찾아다녔지만, 스물살은 잘 쓰지 않았다. 초짜라서.
마침, 엄마 친구가 아귀찜 집을 오픈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친구에게 부탁해 없는 알바 자리를 만들어 밀어 넣었다. 첫날은 소위 말하면 오픈 빨로 매우 바빠서 일을 배울 여유조차 없는 날이었다. 대학 3년 동안 주말마다 쉼 없는 알바를 했다.
아귀찜 집에서 주말에 하루에 12시간씩 서빙하고 눈물도 흘리고 다치기도 했다.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에게 치이기도 하였다. 식당 아줌마들은 내 앞에서는 공주야, 공주야 하고 불렀지만 힘든 일은 나에게 다 떠넘겼다. 사장님이 없을 땐 나에게 일을 맡기고 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어떡하든 일을 적게 하려고 꾀를 부렸다.
그중 가장 생각나는 것은 내가 처음으로 알바하다가 눈물 흘린 날이다. 매우 바쁜 주말 저녁시간에 그저 손님이 없는 자리는 치우기 바빴다. 음식이 나오면 나르기 바쁜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자리에 손님이 없고 외투나 가방이 없어 자리를 치웠는데, 치우는 도중 남자 두 분을 포함한 일행이 외투를 입고 다시 자리로 들어왔다. 멘붕이었다. “아.. 망했다” 그분들은 밥 먹다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미숙한 아르바이트생 때문에 먹던 음식들이 잔반들로 섞여 다 없어지고 있었다. 나는 너무 큰 실수와 바쁜 와중에 눈물이 줄줄 나왔다. 그중 한 아주머니는 “학생 괜찮아요?? 천천히 해도 돼요.”라고 말해주시기도 했다.
나는 그저 로봇같이 일만 하느라 눈물이 나오는지도 몰랐다. 일하는 것이 서툴러도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었다. 마음과 달리 바쁘고 힘든 알바 생활이 짜증나 나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결국 화장실에 잠시 뛰어가 휴지로 눈물만 벅벅 닦아댔다.
친구들과 알바 경험을 이야기하다 보면 모두 다 같이 하는 말. "울지 않은 알바는 알바가 아니다.
알바는 제일 하층민이다.”
돈을 번다는 것은 단순히 통장의 입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번다는 것은 사회의 쓴맛과 아픔을 모조리 겪는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 품에 있다가 나 혼자 뚝떨어진 아귀찜 집은 나에게 너무 낯설고 힘든 곳이었다. 손님들이 못한다고 구박하기도 하고 어리다고 무시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곳에서 3년을 견뎠고 인정받았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찐한 농담도 같이 맞장구를 쳐야 했으며, 손님에게서 멍청하다, 무식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식당 사장님이 친한 사이어서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의 갑질이 판을 쳤다. 장사는 더럽고 힘든 일이었다. 돈 내고 밥먹는 일이 그렇게 유세를 떨 일인지. 제발 그냥 밥 사 먹지 말고 너네 집 가서 드세요, 하고 싶었다.
돈을 번다는 것은 참 더러운 일이다. 이런 말 듣고 이런 대우받고 더러워서 안하고 때려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통장에 매달 꽂히던 숫자를 보면 때려치우고 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아침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대학생활 3년 동안 주말을 희생했다. 알바 갈 생각에 금요일 밤부터 긴장이 되어 너무 괴로웠다. 남자 친구랑 주말 데이트는 꿈도 못 꾸었다. 거기다 학기마다 장학금을 받았다. 실기와 이론을 모두 잘해야 해서 두배로 힘들었다. 주말 알바를 마친 저녁에 다시 학교에 가 그림을 그렸다. 힘들어서 술도 많이 마셨다. 구역질을 참으며 또 손님들 서빙을 했다.
돈을 벌게 되어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았다. 떡볶이를 먹고 싶을 때 맘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게 제일 좋았다. 먹고 싶은 걸 내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있다는 소비의 자유가 제일 흐뭇했다. 남동생에게 먹는 걸로 큰 소리 칠 수 있었다. 부모님이 힘들 때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돈을 벌면서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고, 어른이 다 착하지 않다는 것도 보았다. 착한 어른보다 약고 꽤 많은 어른이 더 많았다. 어린 딸같은 학생을 깔보는 비겁한 어른이 많다는 걸도 겪었다. 그런 어른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귀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생활보다 더 많은 인생을 배웠다.
그 뒤로 어떤 알바도 두렵지 않았다. 알바의 달인이 되어 카트라이더 알바, 식당, 화장품. 동사무소,미술학원 알바 등등 안한 알바가 없었다. 차곡차곡 돈이 모였고 내 임용을 위한 비자금으로 쌓여있다.
돈을 번다는 것은 더럽고, 사회의 쓴맛과 아픔을 모조리 겪는 일이 틀림없다. 아직은 그렇다.
연말이면 퇴직까지 남은 해를 매번 헤아린다. 내년이면 딱 10년이 남는다. 국민연금이 65세부터 나오니 5년 동안은 저축해둔 돈으로 버텨야 하는데...
월 2백을 생활비로 잡으면 1년에 2천4백, 5년 이면 1억 2천이 있어야 한다. 이때가 되면 아이 셋중 누군가는 결혼을 하거나 부모님은 편찮으실 나이다.
고정적인 생활비만 계산해도 이 정도. 남편의 퇴직은 4년 남았고 아들은 올해 고3이다. 부양의 의무와 돈벌이의 수명이 서로 줄다리기를 하는 모양새다. 무승부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돈벌이의 수명이 질 듯하다.
평생 번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요즘 이사를 가는 문제로 남편과 종종 다툰다. 이사를 가는 것은 합의가 되었지만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황당하게 집 값이 너무 많이 올랐다. 서울 집값을 잡는다고 고강도 부동산 정책이 설레발을 치더니 투자자들이 지방으로 밀려왔다. 창원 집값이 덩달아 뛰었다. 잔기침 몇 번 하면 몇 천에서 몇 억씩 집값이 오른다. 투명 지갑인 맞벌이는 도저히 집값의 오름세를 따라갈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정책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정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부동산으로 돈을 벌려는 불굴의 의지는 끈질기고 드세다. 투자의 티긋도 모르는 나 같은 찐서민은 매번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 많은 아파트에는 누가 살고 있나?
돈을 번다는 것은 물음표다. 백화점 명품관에 VIP로 등록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팰리스 타워에 사는 서울 강남의 부자들은 어떻게 그런 삶을 사는 걸까? 사시사철 해외를 밥먹듯이 나가는 사람들은 돈 복을 타고 난 사람일까?
개미인 우리가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내가 물욕적이라 돈돈 하는 걸까. 돈을 번다는 건 지금 내게 풀리지 않는 물음표다. 어떡해야 돈을 잘 벌 수 있는지 여전히 물음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