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꽃은 핀다
은근히 어려운 주제다. 두 딸의 글을 받고도 한참을 고민했다. 야무지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아무렇지 않은 물음에 허둥댔다.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라.... 너무 많았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고. 학생운동을 할 때였나. 남편을 만나 콩깍지가 씌었을 때였나. 소설로 상을 받았을 때였나.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을 땄을 때였나... 나 때문에 자꾸 글이 늦어졌다. 오늘은 글을 올려야지 하고 마주 앉은 시각, 멍 때리다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재작년의 제주도 여행. 동창모임의 부부동반 여행이었으나 나만 혼자 참가한 여행. 남편이 일 때문에 시간이 안되기도 했지만 내가 매니저 역할을 한 덕에 여행경비 제로로 함께한 여행. 엄밀히 따지면 혼자만의 여행. 그렇게 넓은 온돌방을 2박 3일 동안 혼자 쓰다니. 오름을 갈 때도 부부끼리 호흡을 맞추느라 쌍쌍이 흩어질 때 나는 느긋하게 혼자 가고. 우도 전기차로 부부끼리 달려갈 때 혼자서 운전했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추었다. 달리고 싶을 때 달렸다.
외롭지 않고 홀가분했다. 아침 일찍 서귀포 바닷길을 산책하는 것, 부부끼리 술 파티를 벌일 때 혼자 제주 서귀포의 노을을 보는 일. 올레 길을 혼자 걷는 것. 김영갑 갤러리 돌담길의 햇살 한 줌을 기억하는 것...부부끼리 일정 조율이 쉽지 않아 시끌벅적했던 것을 빼면 부부동반 틈새에 끼인 나 혼자만의 여행은 아주 탁월했다. 부부동반인 친구들은 혼자 온 내가 안돼 보인다는 제스처를 했고 나도 은근히 부러운 척을 했다.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짓기에는 여행경비가 0원이어서, 미안했기 때문.
빛났던 순간으로 왜 그때가 생각났을까? 가벼워서충만했다. 내 시간을 나를 위해 온전히 사용한 여행.눈치 보지 않는 시간. 직장에서는 민원과 동료의 눈치를 본다. 가정에서는 남편이나 아이들의 눈치를 본다. 사랑의 범주에는 내 시간과 의사결정의 양보까지 포함한다. 양보하는데 익숙했다. 어쩌면 억지로 남편을 데려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불온한 욕망을 노출한지도 몰랐다. 혼자 있고 싶은 욕망, 바다의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유영하는 시간.
여성의 욕망은 불온하다. 전업주부로 사는 중년 여성의 욕망은 더욱 불온하다. 등 따습고 배부르니 호강에 받쳐서 저런다라는 경멸에 찬 시선에도 딱히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해 여자들은 외롭다.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기,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에 헛헛해하지만, 스스로도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두리번거릴 뿐....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은 비교적 안전하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을 욕망하면 위험해진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은 이기적이고 몽상적인 일로 치부된다.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중, 핑크 소파를 박차고 나온 우아한 미친년 윤석남 중에서)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은 부부동반 여행에 꼽사리 끼인 여행이었지만 혼자여서, 온전히 혼자여서. 어쩌다 오랜만에 혼자여서. 돌아갈 곳이 있는 혼자의 여행이어서. 집으로 가면 내 볼을 꼬집으며 장난쳐 줄 남편이 있는 혼자여서. 엉겨 붙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질 세 녀석들이 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혼자여서, 그래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 아니었는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순간은 계속 빛날 것이다. 불온한 욕망을 항상 꿈꾼다.
고등학교에서 첫 시험을 쳤는데 반에서 1등을 했다. 우와, 중학생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다음 시험 1등은 내가 아니라 K였다. 바로 뒷 번호인 K. 내가 서술형 답안지를 확인하고 돌아오면 K가 선생님과 함께 답안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점수는 대놓고 공개하지 않았지만 서술형 답안지를 넘기는 속도가 곧 점수였다. K가 빠르게 서술형 답안지를 넘겼다. 만점이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K에게서 강한 질투를 느끼게 되었다. K는 내가 바라던 공부 잘하는 아이의 표본이었기 때문에. K를 따라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마음이 이상하게 꿈틀거렸다. 내가 K를 따라잡는 것보다 K를 끌어내리는 게 더 편했다. K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시험을 나보다 못 치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독서실을 함께 다니고 졸던 나를 깨우며 "ㅇㅇ대 안 가고 싶어?"하고 장난스럽게 말하던 K. K는 좋은 친구라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K에게 가졌던 못된 생각에 죄책감을 느꼈다. 때묻은 마음을 먹었던 대가였을까. 1학년 끝까지 K는 견고한 반 1등을 유지했다.
1학년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한 해 마무리 겸 각자 롤링페이퍼를 썼다. 몇 명이 지나가고 내 손에 K의 것이 왔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나의 질투심에 대해 고백하기로 했다. 이제 1년이 마무리되니 묵은 마음을 털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에게 가졌던 마음을 솔직히 꾹꾹 눌러 적었다. 롤링페이퍼를 보내고 나니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각자 롤링페이퍼를 확인하고 K가 다가왔다. "야~네가 그런 줄 몰랐다~" 특유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다. K를 향했던 날 선 감정과 그로 인해 느꼈던 자괴감 등 모든 응어리가 사라졌다. 진정으로 K를 인정하고 응원해줄 수 있었다.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이 높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앤드류 카네키의 묘비명 중에서)
그때가 빛났던 순간으로 떠오른 건 유치한 내 질투심을 넘어 내가 나를 인정하고 K도 인정하며 어른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기지 않고 인정하는 쿨함속에 K와 진짜 친구가 되었고 계속 서로를 응원했다. 우정은 질투가 아니라 응원이다. 진짜로 잘되기를 바라는 응원, 그때 진짜여서 나는 가장 빛났고 어른이 된 기분에 으쓱했다.
살아온 인생이 그리 길지 않은 탓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이란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최근에 인생의 쓴맛들을 많이 보다 보니 내가 빛났던 순간들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고 느껴진다.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은 언제일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들 중에 열심히 뒤져보았다.
어릴 때는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설탕처럼 어린 시절은 달달하기만 했다. 그중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의 하루를 써보려 한다. 어릴 때 내가 지금의 나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2004년 12월 18일
엄마가 며칠 전부터 뭔 말인지도 모르는 가사를 알려주며 노래를 연습시켰어. "와이라노 ~ 와이라노 ~ 이라지 마이소~가시나의 마음은 갈대라카이 ~"
엄마, 근데 이게 무슨 말이야? 장윤정의 어머나 노래는 워낙 유명해서 노래 반주는 즐겁고 춤이 절로 나오는데, 나는 어렵기만 한 사투리로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거였어. 엄마랑 저녁마다 노래를 불러대는 건 신나서 춤을 춰댔지만 헷갈리는 가사는 어린 나에게 힘든 숙제.
하지만 큰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어. 왜냐하면 내가 왜 이 노래를 연습하는지, 내가 어떤 무대에 서는지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거든. 그날 당일이 되었어. MBC 라디오 아구할매라는 프로그램에서 주최하는 사투리 아구할매 경연대회였어. 사실 그날도 나는 어떤 날인지 몰랐어.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를 따라가서 이쁜 새 옷을 입고 동생 두 명은 할머니에게 맡겨 두고 엄마는 내 손만 잡은 채 경연장으로 들어갔어. 그날 엄마가 동생들을 제쳐두고 나에게만 관심을 주는 게 아주 좋았어. 엄마는 늘 동생들 차지였거든.
대기실로 이동하니 엄청 많은 화장품을 가진 분장실 언니가 있었어. 엄마는 그 앞에 나를 앉히고 말했지.
“애기니깐 이쁘게 립글로스 한번 발라주이소~”
나는 그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해. 마치 내가 TV 속 연예인이 된 것만 같았어. 분장실 언니는 반짝반짝 빛나는 립글로스를 붓으로 내 입술에 발라주었지.
엄마랑 몇 번 더 연습하다가 리허설 무대에 올라갔어. 노래 반주는 나왔지만 너무 큰 무대에 조명이 쨍쨍하고 엄마랑 나랑 두명만 그곳에 덩그러니 서 있으니 엄청 떨렸어. 무인도에 우리 둘만 있는 느낌. 너무 떨린 나머지 먼 말인지도 모르겠던 경상도 버전 어머나 가사를 까먹고 우물우물거렸어. 밥을 삼키지 못해 입에 물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엄마는 내 손바닥에 볼펜으로 가사를 크게 적어주었어.
많은 기다림 끝에 본무대에 올라갈 시간이 되자 엄마는 앞에 사람들이 하는 무대를 보고 내손을 꼭 잡았어. 무대 위는 엄청 크고 많은 카메라도 있고 TV에서 본 진행자도 있었어. 차례가 다가올수록 긴장되어 까먹은 가사 생각보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입술 립글로스에 집중되어있었어.
‘ 내 립글로스가 바른 지 너무 오래돼서 다 지워진 거 같아. 어떡하지?’ 노래를 잘 불러야지 생각보다 처음 내 입술에 발린 반짝거리는 립글로스에 더 관심이 많았어. 무대에 올라갔지.
엄마는 우리를 비추는 조명 속에서 당당하게 큰소리로 준비했던 자기소개를 했어. 안녕하세요! 마산에 살고 있는 아를 세명 둔 아지매, 큰딸은 요있고 둘째는 저-어기 아빠가 델고 있고 막내는 요 내 뒤에 업고 있슴더! 노래 한 소절 부를 테니 잘 봐주세요!
엄마는 동생 두 명을 모두 아빠와 할머니에 맡겨뒀지만 등에 베개를 넣고 보자기로 묶어 담요를 씌워 진짜 아기를 맨듯이 엉거주춤 노래를 시작했어. 와이라노 ~ 와이라노 ~ 이라지 마이소~가시나의 마음은 갈대라카이 ~ 안된다 와이카노 잡지 마이소....
본무대에서는 더더욱 떨렸고 가사를 오물거리며 무대는 끝이 났어. 엄마가 끝까지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1등을 받으리라 생각했어. 내가 무대의 주인공이었으니까. 하지만 야속하게 우리 이름은 시상식에서 불리지 않았고 그날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고 내 기억 속에서 잊혀갔지.
내 인생에서 그래도 빛났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엄마 손을 붙잡고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며 내가 주인공이 되었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해. 가슴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이는 순간. 립글로스를 바르며 카메라에 잘 보이고 싶었던 부푼 기대,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까만 머리.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약간 도도한 일인 것 같아. 내 인생이 앞으로 도도하게 살아질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앨범처럼 그때 기분은 꼭 간직하고 싶어. 진짜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으면 8살 때 그 기분이 그대로 드는지 한번 비교해 보려고 해. 그러니 현재의 나, 가사 외우듯이 열심히 연습하자. 너의 무대는 이제 시작이니까. 아직 조명은 다 켜지 않았으니,
지금 시작일 뿐이야. 리허설도 안했다고....
오십 둘에게 가장 빛났던 순간은 불온한 욕망을 실현했을 때다. 스물에게 가장 빛났던 순간은 어른스러운 우정을 경험했을 때, 스물넷의 가장 빛났던 순간은 주인공이 되었을 때다.
빛났던 순간보다 찌그러진 시간들이 많았지만 한 방의 순간들을 보석처럼 품고 살자.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누가 그 미래를 결정하는지를 안다는 오프라 윈프리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달려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