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싸인을 존중한다

그녀들의 비슷비슷한 싸인

by 양아치우먼


1. 우르르 몰려오거나 남편의 등 뒤에 숨어 오거나


코로나 긴급 고용안정 지원금 신청으로 창구에 하루 몇 백명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워낙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긴급 지원금 업무 탓에

신청서는 복잡하고 사람은 밀어닥치고 정말 전쟁같은 나날이었다.

신청서와 개인정보 동의서와 나머지 서류에 신청자가 싸인을 해야하는 대목은 최소 3곳 이상이었다.


와중에 그녀들을 만났다.

마산은 의외로 어업 종사자들이 많다.

주로 생선이나 해산물을 파는 그녀들이었을 것이다.

같은 미장원에서 한 듯한 똑같은 파마머리, 꽃 분홍색 블라우스, 몸빼바지.

그리고 하나같이 굽은 허리와 억센 손마디들.

이런 곳, 무엇인가 서류를 작성해야 하고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곳에 혼자 오는 60대 이상의 여자는 거의 없다. 여러 명이 뭉쳐서 우르르 오던가 아님,

남편의 등 뒤에 숨어서 혼자 오거나.

남편의 등 뒤에 숨어 오는 나이든 그녀들은 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편 뒤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럴 경우 항상 묻는다. "본인 이세요?"

99%는 뒤에 서 있는 그녀를 가리키며 그녀가 신청자임을 남편이 말한다. 고로 서류상은 아내이지만 실질적인 사용자는 남편이다. 맨 마지막 싸인 부분에서 남편이 하려는 서명 영역을 내가 멈춘다.

"서명은 본인이 직접 하셔야 해요."

남편이 멋쩍어서 슬금 뒤로 빠지면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이 앞으로 나와 서툴게 볼펜을 잡고 어디에 서명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손가락을 짚어 알려주면, 그녀는 아주 신중하게, 자신의 서명을 그린다.

그건 정확하게... 쓴다, 싸인한다가 아니라 그린다는 표현이 맞다. 왜냐하면 진짜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고 느리고 아주 엄중하게.


봉여사의 싸인

김 씨 성을 서툴게 쓰고 그위로 동그라미를 그려 김자를 감싼 모양....



2. 성씨를 감싸는 동그라미

똑같은 파마머리의 그녀들이 내민 신청서 싸인도 한결같이 똑같다. 모두들 성만 다르다. 최 씨, 오 씨, 장 씨, 류 씨... 그리고 그 위에 동그라미.

그중에 한 분이 유독 싸인이 고급지다. 필체가 고급스러운 게 아니라 흔하지 않은 서명이라 더 눈이 갔다. 옥순이었는데 가운데 가로획을 하나로 연결하고

밑에 받침 기역과 니은을 따로 뗀 서명이었다. 얼굴이 넙데데하고 풍채도 좋았는데 여쭤보니 얼마 전에 딸이 엄마 서명을 만들어 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싸인이 너무 흔해서 다른 사람이 따라 하면 안 된다고...참, 멋진 딸이다 싶었고 나는 부끄러웠다.


딸이 만들어준 싸인, 성 씨를 뺐다


엄마의 서명도 늘 그랬다. 정 씨 성을 어눌하게 쓰고 그 위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모양.

엄마의 서명을 본 적이 언제였나? 생각해보니 어릴 적에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도장이나 서명이 필요한 서류의 모든 것은 아버지가 처리했으니 굳이 엄마 도장이나 서명이 필요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농협에 비룐가 뭔가를 신청하러 가서 엄마가 싸인하는 걸 본 것 같다. 입을 앙다물고 삐뚤삐뚤하지만 야무지게 서명을 했는데 결국 내가 그걸 보고는 웃고 말았다. "이게 엄마 싸인이야?"

"넘들도 다 그리 허더라. 그래도 아무 문제없어야."

내가 큭큭 웃자 엄마는, 나도 너거들맹키로 공부를 했시모 더 멋진 싸인을 갖제 했다.

그렇다. 엄마는 일제시대 초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었으니, 엄마를 향해 웃을 일은 아니었다.


결혼해 봉여사(시엄니)와 함께 은행에 갈 일이 있었다. 봉여사의 싸인도 또 김 씨를 쓰고 그 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대한민국 여자들에게 이렇게 싸인하라고 국가에서 매뉴얼이라도 뿌렸나? 했더니....

아뿔싸, 그게 이렇게 나왔을 거란 추측 아닌 경험을 하게 됐다. "서명하세요."

"어머, 어째 서명하지요?"

"... 그냥, 본인 성 쓰시고 그위에 동그라미 그리세요"

나도 바쁘게 일 처리를 하면서 서명을 힘들어하는 그녀들에게 그렇게 쉽게 주문했다.

맞다. 아니 아마 틀림없다.

자기 이름을 쓰거나 내보일 일이 적었던 그녀들이 갑자기 맞닥뜨린 싸인 앞에 허둥댔을 때 업무를 보는 누군가가 그렇게 시켰거나, 아님 그렇게 대신 싸인을 했거나... 그래서 그녀들은 그런 모양의 서명에 눈도장을 단단히 찍은 것이다.

아, 싸인은 저렇게 하는구나.

저렇게 싸인하니 별 탈없이 일이 처리되는구나.

아무도 그녀들의 서명에 대해 고민해주고 연구해 주지 않았으니까, 배운 적도 없었으니까. 자신의 경험과 모두의 경험으로 그렇게 터득한 것이다.

그렇게 그녀들은 세뇌되고 학습되어 싸인의 쉬운 방법을 잊어먹지 않고 매번 그렇게 서명하는 것.

동그란 도장 모양을 동그라미로 대체하고 자신의 성 씨가 자신의 이름을 대표했던 것, 그것이 아닐까?

(이건 오로지 나만의 피셜)



3.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하나, 멋진 서명 갖기

올해 대학생이 된 엘리스는 얼마 전부터 자신의 싸인을 만들기 위해 몇 날 며칠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며 계속 묻는다.

"엄마 이건 어때?...... 이거는?"

자신의 싸인이 생긴다는 것은 어른이 되는 하나의 과정이겠지. 자신만의 싸인으로 자신의 선택이 존중되는 시기에 이르렀다는 징표다. "대충 해"

"엄마, 평생 갈 싸인인데 이쁘게 해야지.."

그리고 나 보고 내 싸인을 해보라고 한다. 또 쪼르르 아빠 싸인도 받아 본다.

나보다 착한 늑대 싸인이 더 멋있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내 싸인을 만들기 위해 며칠 동안 내 이름 석자를 이리저리 고쳐 보고 한자도 영문도 갖다 써보고.... 그래서 내가 내 서명을 언제 처음 사용했더라. 우리 때는 기껏 해봐야 이니셜 정도로 멋을 부리면 그래도 제법 고급진 서명에 속했는데 요즘은 동물이나 이모티콘도 서명에 사용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서명을 돈 받고 만들어주는 곳도 생겼다.


그게 뭐라고 돈 주고 만들기까지 하나 했다가, 아니다. 평생을 달고 다닐 서명인데, 자기만의 브랜드인데 , 돈주고 못 살 이유는 또 뭔가? 싶기도 하다.


엘리스가 만든 싸인


엄마에게 용돈도 좋고 이쁜 옷 선물도 좋겠지만 옥순 여사의 딸처럼 돈 주고라도 엄마의 멋진 서명을 하나 선물해 주는 건 어떨까?

그럼 분명 엄마들은, 내가 서명할 일이 뭐가 있다고? 하든지, 아님 그런 걸 왜 비싼 돈 주고 하냐며 타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들어 온 서명을 가르쳐 주면 열심히 따라 그려 보며 내가 이런 이름이었구나, 이런 느낌이었구나 뿌듯해 할 수도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할 뿐이다.

엄마들은 자신을 향한 사랑에 너무도 인색한 삶을 살았으니까. 싸인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을 알아가기를 바라며, 너무 늦지 않게 그녀들의 멋진 싸인이 종이 위에 휘~릭 갈겨지기를 기대한다.


정세랑 작가의 싸인


# 멋진 싸인은 유명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멋진 싸인은 엄마도 가질 수 있는 모두의

평범한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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