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리의사 Apr 19. 2021

나는 환자 발바닥을 보았다.

슬리퍼 대신 신발을.

 아이는 태어날 때, 머리부터 나온다. 안에서 밖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얼굴을 쑥 내민다. 오랜 어둠에 익숙한 눈은 빛이 따갑고, 어머니의 양수에 익숙한 폐는 갑자기 훅 밀려 들어오는 공기가 차갑고 낯설기만 하다. 아이는 무섭고 놀라 힘차게 운다. 머리 대신 발이 먼저 쑥 나오면 큰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잔뜩 찡그리며 우는 얼굴 대신 아무 표정도 소리도 없는 발바닥이 먼저 보이면 아이는 죽을 운명이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 태아가 뱃속에서 뒤집혀져 머리 대신 발이, 얼굴 대신 발바닥이 앞서 나올 모양이면, 의사는 배를 갈라서라도 아기의 머리와 얼굴부터 나오게 한다.

 아이뿐만 아니다. 어른인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본다. 옷을 입으면서도, 화장을 하고 또 지우면서도,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면서도 자신의 얼굴을 본다. 마치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는 냥 거울을 보며 괜히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씩 웃기도 한다. 하지만 발의 얼굴인 발바닥을 볼 일은 없다. 사람을 만날 때면 신발을 신는 것으로는 모자라 양말까지 신어 발바닥을 꼭꼭 숨긴다. 발바닥을 보려면,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릎을 접고 발목까지 꺾어 들어야 볼 수 있다. 그것도 잠시뿐. 가시에 찔렸을 때야 "악"하고 주저앉으며 발바닥을 좀 쳐다볼 뿐이다.

 모두 얼굴만 본다. 아무도 발바닥을 보지 않는다. 산다는 건 결국 발바닥 대신 얼굴을 보는 것이다. 내 얼굴을 보고, 드러내고, 남의 얼굴을 마주한다. 살려면 얼굴을 내밀고 발바닥을 숨겨야 한다. 잘 때마저도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놓고 이불속으로 발바닥을 감춘다.


 선별 진료소로 나가는 길이었다. 응급실을 스쳐 지나가는데, 응급실 한쪽 구석에 있는 처치실이 분주했다. 복도 쪽으로 향한 환자 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옷이 벗겨진 환자 가슴 위에 올라탄 채 있는 힘껏 두 손으로 정지한 사람 심장을 위아래로 펌프질하고 있었다. 의사가 심장을 압박할 때마다 가슴은 내려앉고 배는 솟아올랐다. 임산부처럼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배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외부의 힘에 요동쳤다. 의사가 심장을 압박할 때마다 가슴은 내려앉고, 배는 솟아올랐다.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부푼 배 너머로 얼핏 보이는 작은 얼굴은 태풍 속에 돛단배 마냥 위태로웠다. 파도가 솟구치면, 얼굴이 잠기고 입에 꽂힌 튜브와 앰부백만이 돛대와 돛처럼 간신히 보였고, 배가 꺼지면 침몰 직전의 검푸른 얼굴이 보였다. 60대 남자의 두 눈은 단단히 감겨 있어 다시 떠질 것 같지 않았다.

 의사가 멈춰버린 심장을 꽉꽉 짓누를 때마다, 다시 뛰어야 할 심장 대신 발이 침대에서 떠올랐으나 다시 떨어졌다. 하늘을 쳐다보지도 땅을 디디지도 못하고 있던 발바닥이 선명하게 보였다. 발뒤꿈치에는 굳은살이 세상과의 경계에 따라 두껍게 박혀 있었으나, 세상을 다 막지 못한 듯 곳곳에 지진에 균열된 땅처럼 갈라져 있었다. 발은 전체적으로 검었으나, 발끝에 살이 튼 부분은 하얬다. 

 나는 양 옆으로 고개를 젓고는 발바닥을 외면한 채 밖으로 나갔다. 병원 밖은 안보다 더 눈부셔서 햇빛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실외에는 코로나가 걱정되어 온 사람들이 땅에 두 발을 디딘 채 줄 지어 서 있었다. 나는 부지런히 두 다리로 걸음을 내딛으며 이 사람, 저 사람 얼굴을 보며 진찰을 했다. 신발과 양말 안에 꼭꼭 숨겨둔 내 발바닥에서 땀이 찼다. 긴 줄이 사라지고, 밖에서 할 일을 다 마친 나는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갈 때만 해도 분주했던 처지실이었지만, 이제는 연락을 받고 온 보호자들의 울음만 가득했다. 하얀 시트가 환자의 얼굴을 가득 덮고 있어, 죽은 환자의 발만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엄지발가락은 뭐가 미안했는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살아있을 때 항상 내보이던 얼굴은 죽어서 하얀 시트 아래 숨고, 살아 있을 때 항상 숨어있던 발바닥은 죽어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땅에 얼굴을 묻고 있던 발바닥은 마침내 환한 빛을 보았지만, 아무도 반기지 않았고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모두들 사람 얼굴만 쳐다볼 뿐, 발바닥을 바라보지 않았다.




사진 출처: 1. 표지: 프리픽.




지난 주에 올린 글 <한 시간 전에 응급실에 왔던 아이가 다시 왔다>가 다음 메인에 걸리면서, 많은 성원과 감사를 받았습니다. ^^. 더 열심히 써서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