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에서 사기꾼으로

사기꾼 평행이론

by 빛나리의사

“내가 피가 없는데, 피를 주지는 못할망정 도대체 그 많은 피 뽑아서 뭐 하는 거고?”


병원에 입원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피검사다. 퇴원하기 전까지 적게는 수차례에서부터 많게는 수 십 차례 피검사를 위해 바늘에 찔린다. 때로는 몸이 아픈 것보다 주사에 찔리는 게 더 고통스럽다.


“매형, 피 한 방울로 수백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기업이 있는데 아세요?”


몇 년 전, 벤처 사업가인 처남이 나에게 물었다. 의사인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거 안 될 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있었다. 피 한 방울로 수백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이.


피 한 방울로 수백 가지 질병을 한 번에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테라노스>가 말 그대로 혜성, 아니 유니콘처럼 등장했다. 기업가치는 무료 10조 원. CEO인 엘리자베스 홈즈는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스탠퍼드 대학교 출신으로 어머니 노엘 홈즈는 주사기를 보기만 해도 기절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녀도 바늘 공포증을 물려받았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바늘을 제외하면 말이죠. 158p
단 한 방울이 모든 것을 바꾸다. 277p

매력적인 외모에 명석함까지. 그녀는 언론을 사로잡았다.


환자는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소량의 혈액 샘플을 채취한 뒤 두꺼운 신용카드처럼 생긴 카트리지에 삽입한다. 카트리지는 판독기라고 불리는 더 큰 기계에 삽입된다...... 31p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도 실현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2014년 6월 12일 포춘지에서 파를 로프의 기사가 표지를 장식하자 엘리자베스는 일약 스타덤에 등극했다... “피에 굶주린 CEO”, “피비린내가 날 만큼 대단하다” 301~302p


<좌: 포브스, 우: 포춘지. 여자 스티브 잡스?>

포춘지, 포브스, 월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언론의 극찬에 이어,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이사진들이 테라노스와 엘리바베스 홈즈를 지지했다.


조지 슐츠(전국무 장관), 윌리엄 페리, 헨리 키신저, 샘 넌, 제임스 매티스, 그리고 새로 부임한 두 명의 이사회 멤버인 대형 은행 웰스 파고의 전 CED 리처드 코버스비치, 전 상원 다수당 대표 빌 프리스트.. 테라노스 이사진 소속의 여러 유명인들의 호언장담 덕에 엘리자베스가 진짜배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300p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혈액 진단에 대해 잘 아는 누군가가 기사를 읽고 곧바로 의혹을 품었다는 것이었다. 이 인물은 미주리주 콜롬비아에 사는 병리학자 애덤 클래퍼였다. 그는 여가 시간에 병리학 블로그라는 개인 블로그에서 병리학 업계에 대한 글을 작성했다. 클래퍼는 뉴요커의 기사를 읽고 그 내용이 사실이라기엔 지나치게 좋아서 오히려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319p


거의 모든 혈액 검사 결과는 검사를 망칠 수도 있는 혈중 물질 농도를 낮추기 위해 일정량의 희석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주장한 혈액 샘플의 양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테라노스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희석량은 보통 검사보다 훨씬 많아졌다. 판독기가 검사를 수행할 만큼 액체가 충분하려면 혈액 샘플의 용량이 상당히 증가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혈액을 더 많이 희석하는 것이었다. 114p


그리고 그녀는 몰락한다. 사기였다. 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였다.


월화수목금금금
한국인 말고 누가 쇠젓가락으로 콩을 집을 수 있나
세계 생명공학의 고지에 태극기를 꽂고 온 기분

스타 과학자 황우석이다.

<2004년 3월 사이언스지>


황우석에 대한 책, <진실 그것을 믿었다_한학수>는 황우석에 대한 내용보다 황우석 취재가 메인이고,

<침묵과 열광>은 황우석+정치 및 언론 세력 중심으로 풀어낸다.


<엘리자베스 홈즈>와 <황우석> 모두 공통점이 있다. 일종의 평행이론이다.


1. 고통받는 환자를 도울 수 있는 신기술과 영웅이 등장한다.


미국의 엘리자베스 홈즈는 피 한 방울로 수백 가지 진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한국의 황우석 박사는 체세포 복제를 통해 각종 불치병 치료가 가능할 거라는 희망을 주었다.


2. 언론이 띄워주며, 각종 정치인과 이익 단체들이 지지하고, 국민들이 열광한다.

미국은 포브스와 포천지가, 한국은 장관은 물론 대통령까지 나섰다.


3. 의혹이나 비판을 제기하면, 진실 증명이 아니라 미국은 소송으로 한국은 편 가르기로 공격한다.


4. 결국 관련 분야 연구자에 의해 허위, 사기로 밝혀진다.


미국의 경우 한 병리학자가 개인 블로그로, 한국의 경우 익명의 과학자가 BRIC으로 알려진 생물학연구정보센터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황우석이 복제한 11개의 체세포 줄기세포가 실제로는 한개의 세포를 다른 각도에서 찍어 마치 11개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논문을 쓴 것이다.


투자자들 앞에서 보여 주었던 화면은 성공했을 때 저장했던 화면을 재생해 보여 준 것이었다.

–BAD BLOOD-16p

<진실, 그것을 믿었다 551p>

5. 결국 영웅이 사기꾼임이 밝혀졌지만, 사기꾼을 찬양하던 자들은 반성 없이 그대로 있다.


잘못된 조직, 사회, 국가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도 <BAD BLOOD>와 <진실, 그것을 믿었다>, <침묵과 열광>을 읽는 쏠쏠한 재미이다. 세 책을 동시에 읽어보면서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두 나라의 문화 수준 차이를 느끼게 된다. <진실, 그것을 믿었다>는 너무 언론인의 셀프 칭찬에 가깝고, <침묵과 열정>은 정치 및 유착 관계에 너무 집중해 아쉽니다.


<BAD BLOOD> 강력 추천한다.


<언제나 깨어 있으라.. 심판의 날이 곧 오리라>



BAD BLOOD 책에서는 어렵게 설명하지만, 피 한 방울로 동시에 여러 검사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표본이 너무 작으면, 모집단을 대표할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공 1000개 중에 빨간 공 30개가 있다고 하자. 3%이다.

1000개 중에 100개를 뽑으면 빨간 공 3개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10개를 뽑으면???????


다 떠나서, 내과의사라면 모두 안다. 손가락을 찔러 피를 뽑아 검사를 하면 세포가 깨져 칼륨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온다는 것을.................. 가장 기본인데 저걸 속냐? 아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