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끊을 수 없는 유혹
1998년 탄핵 위기까지 간 옐친이 전 KGB 출신의 푸틴을 깜짝 총리로 선택한다. 평생 알코올 중독자로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옐친이 망해가는 러시아를 잘 이끄는 것은 불가능했다. 1998년 옐친의 러시아는 국가부도 사태인 모라토리엄을 선포하며, 이미 망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소련이 1980년대 무너지게 된 이유는 많지만, 딱 두 가지만 뽑자면 하나는 1986년 4월 26일 발생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건과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하피줄라 아민이 타라키 대통령을 죽이고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 아민은 친소 성향이었는데,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아민이 미국과 접촉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CIA의 공작이라는 소문이..)
침공은 성공적이었다. 소련군은 단번에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공산 정권을 세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공산 정권이 이슬람 세력을 가만 둘리 없었고, 이에 반발하는 이슬람 세력은 지하드(성전)를 선언하고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수천 미터 고지의 산악 지대에 수많은 부족들로 나누어진 아프간은 '제국의 무덤'이라는 별명답게 10년 간 소련을 괴롭힌다. 결국 이 전쟁은 소련의 베트남 전쟁이 되어버렸다. 어마어마한 재정을 낭비하면서도 이기지 못한 소련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어리석게도 미국마저 소련이 철수한 지 약 13년 만인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쳐들어갔고, 20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였지만, 소련과 같이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소련이 무너지자,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카프카스(캅자스) 지역에 있는 전라도 크기의 땅에 사는 체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100만이 조금 넘는 소수 민족으로 고유의 체첸어를 쓰며 종교도 러시아 종교와는 다른 이슬람교를 믿는 민족이었다. 이전 우크라이나에서도 썼지만, 소련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며 모두 독일의 스파이라고 몰아붙이며 대대적인 숙청을 했고, 카프카스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체첸인의 상당수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아픔이 있었다.
이미 많은 영토를 잃어버린 러시아였지만 카프카스 지역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통로이기에 지정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송유관이 지나가기에 러시아는 체첸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3년간 전쟁 끝에 러시아군이 물러갔다. 인구가 2억에 가까운 러시아가 100만이 조금 넘는 체첸에 패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1998년 8월 총리가 된 푸틴은 건강상의 문제로 사퇴한 보리스 옐친으로부터 대통령직을 물려받는다. 보리스 옐친이 워낙 인기가 없었기에 그의 후계자이자 무명에 가까운 푸틴 또한 지지율이 바닥을 쳤다. 그런 상황에서 푸틴이 선택한 것은 전쟁이었다. 푸틴의 러시아는 2년 전 패배를 안겨주었던 작은 땅, 체첸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체첸을 짓밟았다. 체첸 전쟁의 승리로 푸틴의 인기가 치솟으며 그는 2000년 3월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직에 올라 지금까지 권력을 쥐고 있다.
지금의 독재자 푸틴을 만들어준 것은 전쟁이었다.
'강한 푸틴, 강한 러시아' 그가 원하는 것이다.
전쟁 덕분에 20년 넘게 권력을 쥘 수 있었던 푸틴은 이번에는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나는 문득 1904년 러시아 내무 장관인 플레베가 황제인 니콜라이 2세에 속삭이던 말이 생각난다.
혁명의 물결을 막으려면 작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전쟁에서 이겨 황제 폐하의 위신을 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러시아의 승리를, 일본의 패배를 예상했다. 하지만 일본이 승리했고, 러시아가 패했다. 이에 1905년 피의 일요일을 시작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와 러시아는 무너지고 만다.
푸틴은 '전쟁'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켜줄 무기라고 생각했지, 자신을 쓰러뜨릴 무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러일 전쟁의 니콜라이 2세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도 그랬다. 아마 우크라이나 전쟁의 푸틴도 그럴 것이다. 푸틴은 '전쟁'이라는 마약을 끊지 못했고, 그 댓가를 치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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