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리의사 Feb 24. 2022

우크라이나, 한국의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어쩌면 미래

약소국의 비극

 "독일 만세. 히틀러 만세."


1930년 초 소련의 밀밭우크라이나에서 심각한 기근이 들었다. 중국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원조인 소련의 집단 농장1920년대 후반 추진되었다. 가축은 물론이고 농기구까지 국가에서 강제로 빼앗아가니, 국민들은 농사지을 의욕을 잃었고 놔두면 빼앗길 소와 말을 잡아먹기 바빴다.


<대기근의 참상 1>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참상 2>

 거기다 가뭄까지 들어 대기근이 들었다. 당시 세계 3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사람들이 비옥한 흑토 위에서 굶어 죽어갔다. 하지만 무리하게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던 스탈린우크라이나인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곡물을 강탈하여 외국에 팔았다. 그 결과 당시 우크라이나 인구가 3000만이었는데 대략 10%인 300만 명이 아사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과 스탈린이 고의로 자신들을 굶겨 죽였다며 '우크라이나 대기근'대신 '우크라이나 대학살'이라 부르며 이를 갈았다.


<1942년 초 독일의 영토>

 10년 후, 세계 2차 대전에서 독일이 소련을 쳐들어왔다. 단번에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를 포위하여 소련군 70만 명을 포로로 잡고, 거침없이 동쪽으로 진격해 나갔다. 그러자 소련에 한 맺힌 일부 우크라이나 인들은 독일을 해방자로 부르며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독일 나치에게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유태인 다음으로 지구 상에서 사라져야할 슬라브인이었을 뿐이다. 독일 나치에 의한 인종 청소가 이어졌다.



<1944년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

 1944년 전세가 역전되어, 우크라이나에서 히틀러의 독일이 물러나고 스탈린의 소련이 진군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남자, 스탈린에게 3년간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스파이에 불과했다. 독일군에 이어 소련군에 의한 강간, 고문과 숙청이 이어졌다.


<체르노빌 발전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소련은 냉전시대 동안 우크라이나는 슈련의 빵 공장+핵공장(말이 핵공장이지 핵폐기물 처리장)이었고, 그 결과 가난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체르노빌이었으니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노가 어떠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자, 우크라이나는 독립 투표를 했고 무려 90% 이상이 독립에 찬성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2020년 우크라이나의 1인당 GDP는 3,726달러로, 러시아의 10, 126달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동부 유럽의 병자가 바로 우크라이나이다.

 그리스 시대부터 곡창지대로 로마에까지 밀을 수출하던 우크라이나로서는 지금의 가난은 40년 넘게 이어졌던 소련과 러시아 지배 때문일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는 먹고살기 위해 유럽에 손을 내밀었다. 유럽은 우크라이나에게 를 약속하는 대신 계산서를 내밀었다. NATO 가입이었다. 즉 러시아를 막아줄 몸빵 역할이었다. 러시아로서는 상대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약소국 우크라이나의 비극이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36년 간 일본의 지배(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지배)와 6.25 전쟁(세계 2차 대전의 우크라이나)를 겪은 우리나라가 떠오른다. 누구는 '신냉전'이라며, 미국과 러시아의 힘의 대결이라고도 하나 이 또한 강대국만의 생각일 뿐이다.

우크라이나는 한국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어쩌면 미래일지 모른다.

이에 나는 두렵고 슬퍼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번 선거에서 제가 뽑은 사람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