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기보다 단정하고 무엇보다 깨끗하게 입는다. 깔끔한 남색 면바지에 편한 구두를 골랐다. 172cm의 키에 깔창이나 키높이 구두를 생각 안 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앉아있으면 표가 잘 안 나고 걸을 때 남의 신발처럼 어색하고 불편하다.
셔츠는 흰색이 기본이지만, 더운 날에는 시원한 느낌을 주려고 블루 계열을, 겨울에는 과감하게 연한 핑크를 입기도 한다. 셔츠를 매번 다려 입을 시간과 여유가 없어, 살 때부터 주름이 잘 지지 않는 링클 프리를 고른다. 넥타이를 맬까도 생각했지만, 얼굴도 크고 목이 두꺼운 나는 넥타이를 매면 목이 갑갑해 몇 번 하다 이제는 하지 않는다.
향수를 가끔 뿌리기도 하지만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기분전환을 위해서다. 포근한 플라워 계열보다는 상쾌한 아쿠아 계열을 선호한다. 터널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와 심한 폭설이 내렸을 때 딱 2번 말고는 몇 년간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없다. 항상 10분에서 20분 정도 일찍 도착하여 미리 준비를 하는 편이다. 헐레벌떡 서둘러 뛰어오며 땀냄새를 풍기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을 넘어 추태다. 나는 준비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아,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물을 조금 마셔 목을 축인다. 가장 중요한 첫마디에서 목이 갈라지면 점수가 깎이니까.
당신은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골랐다. 나를 알거나 만난 누군가가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집이 근처였을 수도 있다. 누군가 인터넷에 쓴 나에 대한 평가를 보고 왔을 수도 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당신은 나를 고를 수 있는 갑이었지만, 나를 만난 후부터 당신은 을이 되니 신중히 결정했기를 바란다. 내가 마음에 안 들면, 또 다른 사람을 고르기 위해 돈과 시간뿐만 아니라 귀중한 에너지까지 써야 하니까.
그렇게 이 땅에 있는 수천만 명의 사람 중에 당신과 이 땅에 있는 13만 명의 사람 중에 내가 만났다. 항상 그렇듯 내가 먼저 첫마디를 건넨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당신은 나를 만나러 온 환자고, 나는 당신을 맞는 의사다.
나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혹시나 바로 앞 환자가 귀가 잘 안 들리는 할아버지여서 음성을 높였더니 목소리가 갈려져서 귀에 거슬렸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을 응대한 직원 태도부터 조명이나 벽지 색깔은 마음에 들었는지, 의자는 편했는지 궁금하다. 너무 많이 기다렸다면 내가 인기가 많아서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고,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면 내가 인기가 없어서라고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지 않고 진료를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겨주면 좋겠다.
병원 특성상 아무리 방향제를 써도 소독약 냄새를 숨길 수 없는데, 너무 강해 코가 얼얼하거나 불쾌하지 않았기를.
좁은 진료실로 당신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냄새가 훅하고 풍긴다. 너무 진한 향수 냄새나 화장품 냄새를 맡으면 머리가 어쩔 하다. 너무 아파서 오거나, 다쳐서 급하게 온 게 아니라면 당신에게서 심한 땀 냄새나 발 냄새는 안 났으면 좋겠다. 불쾌해서 그런 건 아니다. 의사로서 인간이 맡을 수 있는 냄새는 최고의 향기는 못 맡아봤어도 최악의 악취는 맡아보았기에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다음 환자 그 냄새를 맡고 인상을 쓰면서 마치 내가 그 냄새의 범인인양 나를 쳐다볼 때, "이건 제 몸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에요."라고 변명하기가 구차해진다.
"열이 나요"
"며칠이나 되었어요?"
"꽤 (제법) 됐어요."
"꽤"와 "제법"이라는 말에 의사가 스쳐 지나가듯 인상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하루나 이틀 열이 났으면 의사는 감기부터 단순 몸살을 생각하고, 일주일이 넘어가면 폐렴, 요로 감염부터 암까지 생각하는데 "꽤"라는 말은 의사에게는 물론이고 당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의사는 다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혹시 앓고 있는 질환이나, 먹고 있는 약, 수술하거나 입원한 적 있어요?"
라고 했을 때,
"심장이 안 좋아서 심장약 먹어요."
라고 말하면 의사는 속으로 한숨을 쉴 수도 있다. 심장 질환만 해도 책이 한 권이고, 심장약 종류만 해도 수백 가지다. 거기다 하필이면 심장은 신장과 발음이 비슷해 헷갈린다.
"신장요? 심장요?"
의사는 또다시 묻는다.
"혈압약으로 노바스크 5mg과 고지혈증으로 리피토 10mg 복용 중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사는 컴퓨터 모니터를 향하던 시선을 다시 당신에게 집중할 것이다.
'오, 이 환자는 자기의 몸을 잘 챙기는구나.'
의사는 정신을 더 집중해 꼼꼼하게 진찰을 한다. 마찬가지로
"간이 안 좋아요."
보다
"간수치가 정상치가 40이라는데, 60으로 나왔어요."라고 말하면 의사는 아주 환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 의학은 과학을, 과학은 수학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니 숫자가 제일 확실하다.
내일조차 어떻게 될 줄 몰라 우리는 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안고 사는데, 아픈 몸마저 불확실하게 놔두지는 말자. "꽤"보다는 "두 달 전"이, "며칠 전"부터는 "어제"부터가, "신장이 안 좋아요."보다는 "신장 기능(eGFR)이 50%."라는 말이 불확실이라는 안개를 걷어내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어렵고 외우기 힘들다면, 굳이 머리가 아니라 기계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처방전이나 검사 결과는 머릿속 기억보다 핸드폰 속 사진이 더 정확하고 더 오래간다.
소개팅에 앞서 이 정도 준비하면 될 것 같다. 이제부터 연애를 시작해 보자.
브런치와 다음에 오르면서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네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의 책, <의사의 생각>많이 사랑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