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김지숙 씨를 평범 그 자체였다. 보통 키에 보통 체격으로 그 나이에 가끔 있는 과도한 화장이나 성형, 화려한 브로치도 없어 눈길을 끄는 게 없었다. 오늘 본 수십 명의 환자 중 한 명으로 진료실 문을 나가면, 바로 잊힐 인상이었다.
얼굴은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숫자는 기억에 남았다. 김지숙 씨는 우리 몸에 군대에 해당하는, 그러니까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공격을 하는 백혈구 수치가 정상인의 절반뿐이었다. 백혈구는 4천 개에서 만개가 정상인데, 그녀는 2천 개에서 3천 개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백혈구 수는 감소보다 증가가 흔하다. 군대인 백혈구 수가 많으면 만개를 넘어가면 세균과 바이러스가 침입했다는 뜻이고, 단순히 백혈구 수가 많은 것을 넘어 폭발했다면 군대가 나라를 장악한 쿠데타, 즉 백혈병 등을 의심하게 된다.
백혈구 수가 적으면, 백혈구가 약물이나 세균 등에 의해 파괴되었거나 백혈구를 만드는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렇기에 백혈구가 과도하게 많거나, 적으면 추가로 골수 검사를 해서 백혈병이나 생성 이상 등을 감별하기도 했다. 그녀가 속 시원하게 해달라고 말하는 검사가 바로 그 골수 검사였다.
그녀를 진료한 대학 병원의 혈액 종양 내과 의사는 백혈구 감소에 대해 "일시적일 가능성이 높으나, 심각한 혈액 질환일 수도 있으며, 필요시 골수 검사를 할 수도 있다."며 설명하였고, 김지숙 씨는 벌써 6개월 넘게 대학병원에서 골수 검사 없이 혈액 검사로 백혈구 수치를 추적 관찰 중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나를 만난 그녀는 의사인 나에게 갑갑함을 호소했다.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심각한 혈액 질환'이라는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계속 지켜보자는 의사의 말이 불안하고, 그냥 속 시원하게 검사를 해서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차라리 해가 쨍쨍하거나, 비라도 화끈하게 내리면 뭔가 확실한데, 잔뜩 흐린 채 언제라도 비가 올 듯 말듯한 날씨가 사람을 가장 우울하고 지치게 만들지 않던가.
사실 골수 검사는 간단하다. 환자를 눕힌 다음, 옆구리 아래쪽 피부에 가장 가까이 있는 골반뼈에 국소 마취를 하고 T 자 형태의 작은 드릴을 힘껏 누르면서 돌리면, 검사는 끝이 난다.
다만 의사는 '우두둑' 하고 뼈가 부서지는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고, 환자는 말로만 들었던 뼈를 뚫는 고통을 몸으로 겪어야 한다. 의사나 환자 모두, 결코 유쾌할 수 없는 경험으로 평생 기억에 남는다.
동시에 나는 같은 의사로서 대학병원 혈액 종양 내과 의사의 결정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원래 질병이야 특별한 원인이 없는 경우가 많아 원인을 잘 모르는 특발성(idiopathic)이라는 말이 따로 있다. 김지숙 씨는 백혈구 감소증의 뚜렷한 원인(약물, 감염, 골수 이상 및 혈액 질환)이 없었다. 그렇다고 골수 검사를 하자고 하기에도 수치가 너무 낮지 않았고, 설령 골수 검사를 해도 경험상 특별한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필요한 검사나 앞으로의 계획 등을 설명하는 건 의사로서의 의무이며, 혹시 발생 가능한 질환을 설명하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혹시라도 운 나쁘게 심각한 질환이 나왔을 경우 의사로서 법적 책임을 피할 수가 없어 모든 경우를 알려야 했다.
환자의 입장도, 의사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뭐라고 하긴 해야 했는데,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황희 정승처럼 여유롭게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물병이 보였다. 물이 반 정도 차 있었다.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갑갑하시죠? 뚜렷한 원인도 모르는 데다, 특별한 치료도 없이 계속 피검사만 하자고 그러고.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골수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요. 걱정도 되고, 불안하고, 미치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의사가 적극적으로 골수 검사를 하자고 하지 않는 건, 그만큼 상태가 괜찮은 거거든요. 오히려 의사가 골수 검사를 하자고 하면, 심각한 질환이 의심되어서 그렇구요. 골수 검사를 안 해도 되니까 지금 상태가 괜찮은 거라고 볼 수 있죠. 그죠?"
곰곰이 내 말을 듣던 김지숙 씨의 얼굴에 안개가 조금 개고, 햇볕이 비치는 것 같았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러니까 미리 걱정 마시고, 담당 선생님 말씀대로 피검사만 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 아프고 힘든 골수 검사 안 하니까 안 해도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 심각한 질환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요."
'아' 다르고, '어'다르다. 특히나 사람의 생명에 관련된 일을 하는 의사라면 그 말 한마디가 더욱 조심스럽다. 똑같은 검사 결과지만, 말 한마디로 환자가 마음속에 짐을 가져갈 수도 있고, 짐을 덜 수도 있다. 어렵고 또 어렵다. 환자가 나가자, 나는 물병에 담긴 물을 마셨다. 이제 물병에 물이 절반도 남지 않았다.
부족한 글이 다음 메인에 걸렸네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브런치에서 썼던 글의 일부가 <의사의 생각>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구독자분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