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리의사 Oct 06. 2021

의사와 연애하기

의사 사용 설명서 2

의사 사용 설명서 1편을 먼저 읽어주세요.

https://brunch.co.kr/@sssfriend/468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이름도 모른 채 얼굴마저 잊어버린다.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고 싶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좋은 의사, 다정한 의사, 따뜻한 의사이고 싶다.


 당신이 만난 의사는 일 년 동안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어쩌면 내가 올해 첫 의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사인 나에게는 오늘 내가 볼 수 십 명의 환자 중에 한 명이다. 당신은 그에게 '유일한 환자'이고 싶겠지만, 나에게는 '무수히 많은 환자'중에 한 명이다.  

 환자인 당신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지도 모른다. 의사인 나도 당신 말이 오래 듣고 싶다. 차 한 잔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3분이다. 모든 의사가 15분, 적어도 10분 진료를 꿈꾸지만, 언제나 그렇듯 꿈과 현실은 멀기만 하다.

 그러니 그 귀중한 시간에

 내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왔는데

 는 제발 병원이 아니라, TV  인생극장에 나올 때를 위해 아껴두시기를. 유산을 물려받을 가족들도 잘 안 들어주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보는 의사가 들어줄 리가 없다. 소중한 시간이 흘러간다.

내가 누군데.....
 

 같은 자랑은 병원이 아니라, 회식 자리에서 수입 소고기 말고 한우 1++을 쏘면서 하셔야 귀를 기울이는 척이라도 한다.  


 당신이 돈이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통증과 질병은 차별하지 않는다. 또한 당신이 받아야 할 검사와 치료는 똑같다.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한 들, 내가 병원 벽에 걸린 그림 액자 뒤에 숨겨둔 이중 잠금장치가 된 금고를 열어 깊숙이 숨겨두었던 주사나 약을 꺼내서 당신에게 줄리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 당신은 꼰대가 된다. 꼰대인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같은 꼰대다. 꼰대는 한 방에 나 한 명으로 충분하다.


 "제가 몇 군데 병원을 돌아다녔는데, 전혀 나아진 게 없어요. 거기다 저 옆 병원 의사는 왜 그렇게 불친절하던지. 제가 병원 나오면서 다시는 안 간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소개팅을 하면, 간혹 전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가 짠돌이었다며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 미래의 인연이 될지도 모르는 눈앞의 상대가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하는 말이 아닐까? 또한 당신이 수많은 이성을 만나보았다는 말은 그만큼 경험이 많으니 자신을 쉽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는 뜻일 수도 있다. (이리저리 추측해보지만, 여전히 쑥맥인 난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상대는 지레 겁을 먹고 '나는 안 되겠네.' 사귀기도 전에 포기 하듯 의사인 나 또한 '다른 수많은 의사가 치료를 못 했는데, 내가 고연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부터 든다.  거기다 어쩌다 당신과 사귀다 헤어지면, 어디 가서 또 당신이 내 험담을 하고 있을까 걱정까지 된다. 그러니 전 이성친구나 의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건 당신 마음속에 묻어두기를 빈다. 마음속에 비밀이 있는 사람이 더 매력적인 법이니까.


 사람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오래 간직한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추억은 애써 떠올려야 하지만, 트라우마는 잊고 싶어도 불쑥 떠오른다.

"당신이 의사냐?"며 손가락질 하던 보호자와 응급실에서 술 취한 채 내 멱살을 잡았던 이영수 씨, 치료를 받고 돈이 없다며 "선생님도 같은 대머리인데, 공짜로 좀 해주세요."라고 했던 60대 김화중 씨도 생각난다. 머리가 없는 것도 서러운데, 그게 할인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잊고 싶었던 사람들이 지나가면, 그 다음은 상태가 안 좋았던 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말기 폐암으로 숨을 헐떡이던 정순분 할머니, 술로 인해 심장이 풀어졌던 김경숙 씨, 얼굴에 암이 퍼져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이재준 씨. 분노와 슬픔 다음에서야, 미소가 떠오른다. 나를 명의라고, 선생님 덕분이라고 손수 편지를 써 주신 김재준씨와 김병무씨이다.


 그러니 동네 의사인 내가 당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는 건, 당신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당신이 병원에 몇 번 왔으나 내가 당신 얼굴을 보고 못 알아보고, 차트를 보면서 겨우 '아'하면서 고개를 끄떡인다면 당신은 섭섭할 수 있으나 사실 의사와 환자로 가장 이상적인 관계다. 의사인 나와 연애 겸 진료가 끝나고 헤어져 몇 달 후에,

  

 그 대머리 의사,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좋은 사람인 것 같았어.
 

같이 아침 안개처럼 어렴풋한 추억으로 남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의사와 소개팅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