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도 사람이 싫다

by 빛나리의사


종종 환자로부터 더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자기 입장에서 치료에 몰입해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물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환자 입장에 마냥 푹 빠져 있는 의사가 과연 좋은 의사일까. 감정의 전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 일 잘하는 걸까. 그게 정말 환자에게 도움이 될까……. 그래서 의사와 환자사이에 갈등이 싹 튼다. 무조건 내 편이 되어 공감해달라는 환자의 요구.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냉정히 대응해야 한다는 직업적 의무감. 22 page


환자고객으로, 의사변호사로, 치료재판으로 바꾸면 된다. 글을 읽다 깜짝 놀랐다. 변호사의사로 바꾸기만 하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기에.


“치료해 주겠다. 치료할 수 있다. 무조건 낫는다. 다른 의사는 잘 몰라서 그러는 거다… 나만 믿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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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주겠다. 이길 수 있다. 무조건 이긴다. 다른 변호사는 잘 몰라서 그러는 거다… 나만 믿으면 된다.”

안타깝게도 그런 말은 거의 다 허풍이다. 109 page


살릴 사람은 확실하게 살려야 한다.

그리고 죽을 사람 중에서 일부는 무승부 정도로 막아낸다.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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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사건은 확실하게 이겨야 한다.

그리고 질 사람 중에서 일부는 무승부 정도로 막아낸다.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변호사다. 78 page


언급조차 하지 않고 꼭꼭 숨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도 그런 건 차라리 낫다. 금방 티 난다. 의심스러우면 끝까지 질문해서 이야기를 끌어내면 된다. 더 힘든 건 작은 부분을 슬쩍 감추거나 교묘히 줄여버리는 환자(의뢰인)다. 한참지나서야 사실을 알게 될 때도 있다. 난감해진다. 그때까지 이미 진행한 치료 방향(변론 방향과 내용)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 불리하게 작용한다. 의사(변호사)에게도 손해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크게 피해 보는 건 환자(의뢰인) 본인이다. 82 page


나 또한 수많은 고객들이 떠올랐다. 성병인데, 자신은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끝까지 우기던 60대 아저씨부터해서 아내를 폭행한 50대 아저씨에게 응급실에서 멱살 잡혔던 일, 심근 경색으로 당장 대학병원 응급실 가야 하는데 여기서 어떻게든 안 아프게만 해달라고 했던 70대 노인까지. 그런 사람을 보다 보면, 모든 걸 떠나 인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사람이 싫어진다.


이 책의 장점은 다양한 사건들과 표지에서 소개한 대로 ‘진짜’ 변호사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번은 읽어 볼만한 책이다.


(이제부터 스포일러 있음)

KakaoTalk_20220106_141316923.jpg <저자 사인본>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사람이 싫지만, 결국에는 그래도 사람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로 끝이 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읽다보니 어느새 책이 끝나가고, 사람을 좋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 구절이

나는. 정말. 사람이 싫다.

였다. 마침표까지 정말 앞 뒤에 팍팍 찍어가며... 어? 이건 아닌데.



의사로서 사람이 싫었던 적은 무수히 많다. 처음에는 입원을 시켜달라고 사정사정 하더니, 퇴원하자고 하니 퇴원은 내가 원하는 날 하겠다고 버티다가 끝내 퇴원하면서 진단서 5장을 떼 가던 보험 사기꾼 아주머니, 어제 아이가 학교 결석을 했는데 이 병원에서 진료 받은 것으로 진료 확인서를 떼 달라던 학부모, 다른 사람 이름으로 수면제를 타 가려던 30대 여자 등. 나 뿐만 아니라, 의사라면 다들 “사람이 싫다.”라는 제목으로 책 한 권씩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있다.

분명히 있다. 남편이 돌아가신 후, 별로 해 준 것도 없는 나를 찾아와 감사의 편지를 써 주신 분이……. 자신이 제일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선생님,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환하게 웃어주는 환자가. 자가 격리 기간에 의사 선생님 주려고 그렸다며 그림을 선물하는 6살짜리 아이가........


끝으로. 이 글을 쓸 시점에 작가가 많이 힘들었나 보다. 그럴 땐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인다. 나중에 조금 좋아지면 이 책을 쓴 것을 부끄러워하며 “사람이 좋다.”라는 제목의 새 책을 쓰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