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장의사, 그리고 저승사자
꽃이 피는 봄날, 나는 사람이 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너는 의사가 아니라, 장의사야.
윗년차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환자가 돌아가시자 주치의인 나를 장의사라고 놀려댔다. 그날은 내가 장의사에 이어 저승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원 환자가 퇴원할 때, 의사로서는 보람을 느낀다. 내가, 나였기에 환자를 살렸다는 그런 기쁨은 아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가 아니라, 다른 의사라도 치료해도 그 사람은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맡은 일을 끝냈다는 성취감에 가까웠다.
다만 환자가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병원을 나갈 때마다 매번 패배자가 된 것 같았다. '의사인 내가 좀 더 잘했으면 그 환자가 살았을까?'라는 질문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 당시 호스피스 담당이었고, 모든 환자는 생명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만 그 죽음은 다른 이들과 달리 너무나 선명하고 확실했다.
김종남 씨도 내가 맡은 환자 중 한 명이었다. 50대 후반의 그는 5년 전 국내 최고의 췌장암 명의에게 장장 8시간에 걸리는 수술을 잘 버텨냈다. 수술 후 상태도 좋았다. 하지만 수술 후, 3년 만에 암이 재발했다. 완치는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다.
그의 얼굴 가득한 주름에는 강한 의지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60에 가까운 그가 평생을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가 어렸을 적 가난을 이겨내고 몇 번의 위기를 버티며 작은 회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동시에 두 아들과 딸을 이름 있는 대학에 보냈던 것처럼 암도 이겨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자신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항암 치료를 포함해 모든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매정한 암은 잡초 같이 그의 몸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래도 그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췌장암과 싸웠고, 다가오는 죽음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김종남 씨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죽기에는 아직 젊고,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아파도 참으며 진통제를 삼켰다. 약은 점점 늘었고, 결국 주사제로 바뀌었다.
한 번은 배를 후벼 파는 고통이 김종남 씨의 꽉 깨문 이를 뚫고 나오자, 그는 자신이 결코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시시때때로 찾아오고, 어느 순간 물조차 목으로 넘길 수 없자 김종남 씨는 자신이 결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지자, 그는 터진 둑처럼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일어서기는커녕 앉을 수조차 없어 침대에 파묻혀 있었다. 의사는 가장 먼저 진단을 하고, 그에 맞는 치료를 생각해 환자를 살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내가 김종남 씨의 주치의가 되어 가장 먼저 한 것은 그가 얼마나 오래 살지를 예측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제 그가 죽을지 예상하는 것이었다. 그가 죽을 시점을 알아야 그에게 남은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주일도 길어 보였다. 의식마저 낡은 백열등 마냥 깜빡깜빡거렸고 정신을 차리면 통증이 찾아왔기에 나는 마약성 진통제를 꽤나 고용량으로 쓰고 있었다.
"718호실 김종남 님, 산소 포화도가 90으로 떨어져요."
일반 환자였다면, 각종 검사를 해서 피 속에 산소 농도가 떨어지는 이유를 찾고 즉시 교정해야 했지만 김종남 씨는 아니었다.
"일단 산소 주세요."
나는 병실로 갔다. 산소를 주고 있었으나, 산소포화도는 쉽게 올라오지 않았다. 파란색이어야 할 숫자는 빨간색을 띠며 경보음을 울렸다. 산소를 더 올렸으나, 숫자의 빨간색은 바뀌지 않았다. 올 것이 왔다. 경험상 산소포화도는 계속 떨어질 것이고, 그것은 곧 김종남 씨가 숨이 멎을 것을 의미했다.
나는 모니터의 알람을 껐다. 굳이 기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을 못 넘길 가능성이 가능성이 높습니다.
올 수 있는 가족분들 모두 오시라고 하십시오.
이 말은 가족들이 임종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말인 동시에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다. 혹시라도 틀리면, 마음의 준비를 다한 유가족들에게 큰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내 얼굴은 내가 한 말에 담긴 뜻처럼 무겁고 어두웠다.
병실을 1인실로 옮겼다. 아무래도 다인실에서 누군가 사망하면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이 불안해했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죽음만큼 적막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생명을 켜지고 꺼지는 것이 분명한 촛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명이 끝날 때의 모습은 재에 가까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타고 있는 건지 꺼진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죽어가는 환자는 조용한데, 기계와 의료진만 요란할 뿐이었다.
병동에서 계속 전화가 왔다. 김종남 님은 호스피스 전용 병실이 아니라, 내과 병동에 있다 보니 내과 계열 간호사로서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내가 이상하기도 하고 또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전화가 올 때마다 나는 병실로 향했다. 가서 하는 것이라고는 고개 숙여 김종남 씨를 말없이 쳐다보고 나서는 고개를 돌려 유가족들에게 짧은 목례를 하고 나와서는 간호사에게 "지켜볼게요."라고 하는 게 전부였다. 간호사들은 처음에는 의아에 하고 불안해했지만, 내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산소 포화도의 숫자가 떨어질수록 내가 병실에 들어가는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2시간에서 1시간, 1시간에서 다시 30분으로 줄었다. 다가오는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의사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산소 농도를 가리키는 빨간 숫자가 낮아질수록 내 방문의 빈도는 잦아졌다. 결국 그날 나는 그의 병실을 마지막으로 찾게 되었다.
김종남 씨, 201O 년 4월 OO일 16:40분에 돌아가셨습니다.
끝으로 나는 살짝 떠진 김종남 씨 두 눈을 감겨 드렸다. 김종남 씨가 마지막 순간까지 희미하게라도 앞을 볼 수 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의사가 아니라 저승사자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자주 나타났기에. 그리고 문득 그는 '과거에 저승사자는 검은색 옷을 입었는데, 요즘 저승사자는 흰색 옷을 입네.'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김종남 씨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