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을 넘긴 제 마음속에는 항상 소년이 있습니다. 아내는 그런 저를 "큰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 소년은 인형을, 특히 피규어를 매우 좋아합니다.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해서, 항상 빨래집게로 로봇을 만들며 놀았기에 그에 따른 보상 심리라는 것은 단순히 핑계에 가깝습니다. 집에는 아이들을 핑계로 산 독일 S사 모형 동물 인형이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실제 동물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동물에서 더 나아가 공룡까지 사 모으려다가 아내에게 등짝을 맞은 후로부터는 사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료실의 삭막함을 덜어주는 바오밥나무, 난 "어린 왕자"라고.>
그렇다고 포기할 소년이 아닙니다. 아이 핑계로 동물과 공룡 피규어를 사는 대신 이번에는 환자를 핑계로 인체 모형을 사기로 했습니다. 거기다 택배를 아예 병원으로 하고, 병원에 놔두면 되니 아내에게 들킬 일도 없습니다. 완벽합니다. 다만, 동물 피규어보다 몇 배나 비싼데다, 해외에서 수입되는 제품이라 배송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진료실에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한 인체 모형>
그러던, 어느 날 한 환자가 20대 남자 환자가 자신이 디스크, 정확한 말로는 추간판 탈출증가 있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묻기 시작합니다. 고대하던 순간이 왔습니다. 저는 전시된 척추 모형을 꺼내 들었습니다.
<좌: 정상, 우: 디스크(튀어나온 빨간 추간판이 노란 신경을 누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 빨간 게 잘 보이시죠? 이게 척추뼈와 뼈 사이에 있는 추간판, 정확히는 디스크입니다. 사람이 앞으로 허리를 숙이면 이 빨간 디스크가 압력을 받아 뒤로 튀어나와서 이 노란 신경을 누르면 사람들이 말하는 추간판 탈출증, 즉 디스크가 됩니다. 그러니까 자세가 정말 중요하죠. 보세요. 이렇게 앞으로 허리를 굽히면,,, "
"퍽."
<터져버린 디스크>
설명 도중 디스크가 터져버리면서 빨간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저와 환자 모두 움찔 놀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의사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안 되게 허리를 항상 쭉 펴고 다니셔야 해요."
이 말에 환자가 허리를 곧추세웁니다.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환자 교육이었습니다. 환자가 나가자, 저는 땅에 쏟아진 빨간 액체를 닦은 후, 인터넷으로 모형을 새로 주문합니다. 역시 진정한 참교육은 참 힘이 듭니다. 모두 건강히 지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