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과 불합격
"평소에 알고 있는 질환이나 먹고 있는 약 있으세요?"
의사에게 이 질문은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이름을 묻는 것만큼 익숙하다. 하지만 오늘, 이 상황만큼은 불편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30대의 그녀는 굳이 의사가 아니라 그 누가 봐도, 몸이 불편한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땅에 간신히 버티고 선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에 비해 짧고 나무 분재처럼 뒤틀려 있었다. 외상 흔적은 없었기에 소아마비 같은 질환이 의심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어디가 불편해서 진료를 보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나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그녀는 의사인 나에게 재판받으러 온 것이다.
"아, 채용 검진 하러 오신 거구나. 어떤 일 하시죠?"
"제가 장애인 스포츠 선수로, OO 회사에 입사하기로 되어 있어서요."
"아, 그렇군요. 다리가 좀 불편해 보이시는데요."
"네, 소아마비가 있어요."
나는 고민에 빠졌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 일단 소아마비라고 쓰긴 썼다.
근무하는 곳이 종합병원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경우가 있다.
"평소에 알고 있는 질환이나 먹고 있는 약 있으세요?"
"심근경색으로 스텐트 5년 전에 스텐트 넣었는데요."
나는 있는 것을 없다 하지 못하고, 없는 것을 있다 하지 못한다.
-PCI(2017년) 시술 받음-
그걸 보고 있던 60대 아저씨가 그걸 빼달라고 한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저씨가 혼잣말하듯이 괜히 말했다고 투덜거린다.
환자가 돌아간 후, 검사 결과가 나온 후 나는 합격 여부 칸을 체크해야 한다.
의사인 내가 한 사람의 취직 여부의 적합성을 결정 내릴 수 있을까? 난 옳고 그름을 따지는 판사나 합격 불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면접관이 아니라, 그냥 아픈 사람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사인데...
회사 입장도, 직장인 입장도 모두 이해가 하는데 괜히 그사이에 끼어 혼자 고민이다. 아무리 관련 규정을 찾아보면, 불합격 기준은 항상 "OO 질환에 따른 후유증으로 업무 수행에 지장이 있는 경우"이다. 나는 어떤 업무인지 알 수 없다. 장애인 스포츠 선수에게 소아마비가 장애인 스포츠를 하는데, 지장이 있는 걸까? 경비를 하려는 아저씨는 과거에 심근 경색을 앓았기에 더 이상 일을 하면 안 되는 걸까? 그걸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의학보다 사람이 더 어렵다.
합격.
-종합 소견: 상기 환자, 소아마비(심근 경색) 진단 받은 분으로, 업무 적합성에 대해서는 회사에서 자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의사가 판사가 아니다. 그러니, 이런 항목은 없어지길 기원한다.
경찰이나, 군인은 합격, 불합격, 판정보류 항목이 없다. 그냥 질환이나 이상 소견만 확인하면 된다. 다만, 문신란이 따로 있고, 신체검사 기준표에 "내용 및 노출 여부에 따라 경찰공무원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문신이 없어야 한다."라고 되어 있으니 군인이나 직업 군인을 고려하시는 분이라면 꼭 참고 하기 바란다. 그런데, 직무에 적합한 신체란 도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