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을 때와 적을 때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출근길 내내 혹시라도 지각할까 봐 서두르게 된다. 괜히 끼어드는 차들에게 빵빵거리며 짜증을 내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기 위해 급하게 차선을 몇 번이나 바꾸는 등 평소와 달리 운전이 예민해지고 난폭해진다. 평소와 달리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 시절, 시험 시간이 되어 급히 벼락치기를 할 때마다 항상 이런 생각이 든 건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에 미리 공부 좀 해 둘 걸.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월급날에는 “이번 달에는 이것을 살까, 아니면 맛있는 것을 먹을까?” 기대와 꿈에 부풀어 덩달아 기분도 좋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각종 요금과 함께 카드 값이 빠져나가서, 통장의 잔고가 얼마 남지 않으면 평소에는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크게 느껴진다. 월급이 들어온 날은 흥청망청 별생각 없이 쓰다가, 막상 부족해지면 뒤늦게야
평소에 아껴 쓸걸.
이라는 후회가 든다.
시간과 돈의 공통점이 있다.
많을 때는 아군이지만, 적을 때는 적군이 된다.
돈과 시간이 많을 때는 마음이 크고 넓어지지만, 적을 때는 작고 좁아진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건강할 때는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일을 할 때 별 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술 마시고, 과식하고, 담배를 펴도 별 탈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다 어디가 이상하면 그제야 “평소에 관리할걸.”이라고 뒤늦은 반성을 한다.
건강할 때는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전혀 문제가 없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공부도 일도 하기 힘들다. 거기다 몸이 아프면, 덩달아 마음까지 괜히 아파온다.
진료실에서 의사인 나는 하루에도 비슷한 상황을 수십 번이나 겪는다.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진료와 검사를 받고서, 아무 이상 없다고 하면 얼굴이 활짝 밝아지며 기존에 해 왔던 것처럼 계속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고, 과식을 한다. 반대로 ‘위암’이나 ‘폐암’과 같이 나쁜 결과가 나오면, 그제야 사람은 금연을 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찾고, 나쁜 습관을 하지 않는다.
2년 전에 폐암 검진에서 정상이 나와, 계속 예전처럼 담배를 피워 오시던 분이 안타깝게도 이번 검사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제야 김정환 씨(가명)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제부터라도 금연을 하겠다.”며 진료의뢰서와 함께 금연약을 받아갔다. 김정환 씨는 당장은 대학병원에서 정밀 검사와 수술을 받게 될 것이고, 죽을 때까지 암을 걱정하며 암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문득 손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참혹한 전쟁을 거쳐 이기더라도 그것은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다.”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
명장이란 참혹하게 전투를 벌여 가까스로 이기는 장군이 아니다. 진정한 명장은 평소에 나라를 잘 다스려, 다른 나라가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침입할 엄두조차 못하게 만드는 이다.
시간과 돈은 항상 넉넉히 준비해야 한다. 건강 또한 마찬가지다. 몸은 아플 때가 아니라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 질병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미리 예방하는 것이다.
표지 사진 출처:셔터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