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아홉째날

1024_파리 6일차

by Simba

일기를 조금씩 미루게 된다. 하루가 지나면 기억과 감정도 무뎌져서 그날의 잔상이 점점 흐려진다. 글이란 본래 기억과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에 불과해야 하는데, 흐려진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 기교만 늘어나는 듯하다.


모로코 룸메이트 테릭이 출근하면 와이파이의 부재와 함께 약간의 자유를 느낀다. 누군가와 같이 방을 쓸 거라고 생각을 못해서인지, 아무래도 조금은 불편함이 있는 듯 하다. 간밤에 일자리를 찾느라 조금 피곤함이 몰려온다. 공모전 소식이 궁금했다. 안되겠지 속으로 되뇌었지만 됐을거라, 됐으면 하는 기대가 점점 차올라 감정이 묘하다. 친구에게 전화를 부탁했다. 행동이 빠른 친구는 탈락 소식을 급하게 알려준다. 짐작했던 실패가 확인되면 실망이 적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슬픔은 나눌수록 적어진다. 나이를 먹으며 당연한 진리를 터득했다. 곧장 친구들에게 탈락 소식을 알렸다. 혼자 끙끙 앓는 것 만큼 아둔한게 없다. 말하고 나면 조금이나마 편하다. 지난 저녁에 사둔 피자와 컵라면을 꺼냈다. 소주도 하나 꺼냈다. 아침 9시다. 낮술이 아닌 조술은 처음이다. 소주 반병에 알딸딸하다. 난 슬픈 날엔 술을 먹지 않는다. 술을 먹고 싶진 않았지만 뭔가라도 해야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조금 잤다.


1시가 조금 넘었다. 2시간의 낮잠은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기분이 좋았다. 내일이면 파리를 떠나야 한다. 그래도 에펠탑은 보고 가야지. 기분 전환이라도 할겸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에펠탑으로 가는 길은 숙소에서 조금 멀었다. 메트로 두개를 갈아타야 했지만 내려서 30여분을 걸어가기로 했다. 좋은 선택이었다. 국회 의사당을 비롯해 몇몇 대표 건물을 구경했다. 뭘 하나 지어도 저렇게 예쁘게 만드는구나. 도시의 무엇 하나도 튀지 않는다. 하나로 존재하지 않고 어우러진다. 계획된 통일성이 아니라 공통된 정신을 공유하는 것. 파리라는 도시가 가진 장점이다. 서울을 떠올렸다. 무엇하나 어루러지지 않는다. 간판 하나부터 자동차, 건물, 심지어 사람까지. 공통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남보다 앞서고 싶고, 지독한 경쟁에 중독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누구하나 도드라지진 않는다. 남들보다 앞서고 싶어하는 욕구는 병적으로 강하지만, 남들과 다른 건 견디지 못한다. 비슷하지만 우월해지고 싶어하는 것. 돌이켜보면 사실 나도 그랬다. 인정욕구와 우월주의. 정의 없는 헬조선에 사는 서울 사람이 가진 유일한 공통점이다.


에펠탑은 예상대로 별 것 없었다. 생각보다 크다는 느낌 뿐. 이 많은 사람중에 프랑스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무엇때문에 몇십유로를 내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는 걸까. 2층까지 16유로의 티켓줄을 서다 포기했다. 너무 길기도 했고, 예산도 충분치 않은 데 보고 후회할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 결정의 요소는 '후회'가 됐다. 미래를 예측해서 '후회'의 정도를 판단한다. 안해서 후회할 것 같으면 하고, 하고 후회할 것 같으면 하지 않는다. 그렇게 내린 결론들은 대부분 옳았다. 다만, 예측을 잘못하면 낭패를 본다. 미래의 내 감정을 예측하는 건 항상 쉽지 않다. 에펠탑을 올라가지 않은 건 잘한 선택이었다. 후회에 대한 공포가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일종의 포비아처럼 다가온다. 그 실체가 다가오기 전까지 항상 마음을 졸인다. 이번은 옳았다. 이번은 틀렸다. 벗어나고 싶지만 후회의 고통은 그만큼 크다.


콜라와 빵을 약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득 생각났다. '착하다'의 불편한 감정이 활자화됐다. 착하다는 건 약하다의 다른 말이었다. 착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약한 이들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착하다고 할 때 알게 모르게 기분이 나쁜 건 강해지고 싶은 내 심적 욕구와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다. 착하지만 강한 사람도 있다. 일컬어 내공이라고 한다. 허허실실한 사람들.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은 재미가 없다. 난 남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감정에서 자유롭고 싶다. 내가 날 판단하고 후회와 상처를 재생산하는 연결고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일은 파리를 떠난다. 어떤 사유로든 파리는 좋지 않았다. 매혹적이지 않다. 도시와 여행자의 궁합이라는 게 있다면 나와 파리는 아니다. 지하철의 지린내처럼 대부분의 것이 예상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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